언제부터 과해지는 걸까?
석 달이 조금 넘는 여정이지만 이번엔 기내수하물 12kg 만 가져가려 하기 때문에 무게를 고려해서 짐을 싸야 하는데요. 이것도 있으면 좋겠고, 저건 꼭 필요하고, 중요한 걸 빠뜨리면 어쩌지 하면서 담는 것만 많고, 덜어내질 못하다 보니 평소보다 짐 싸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사실 지난 유럽 여행에서 슈트케이스 하나로 석 달을 또는 그 이상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었기에 스스로를 주어진 환경에 맞춰 생활하는 ’미니멀리스트‘라 생각했는데요. 제 미니멀리즘은 위탁수하물 23kg 수준이 아니었나, 그 이하로 줄이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함께 여행하는 친구는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신발 때문에 살짝 어려울 수 있지만, 충분히 가능하며 오히려 공항에서 훨씬 편리하고 좋다고 하는데요. 저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가방들을 노려보며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있는 걸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다시 짐 줄이기에 박차를 가해 봅니다
짐을 줄이려면 먼저 ’꼭 필요한 것(must-have items)’과 ‘있으면 좋은 것(nice-to-have items)’를 분리하는 게 좋더라고요. 다 가져가고 싶고 어느 걸 가져가는 게 더 좋을지 헷갈릴 때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되는 거죠. 가방의 크기와 무게제한이 있으니 물건의 무게와 부피도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이 각각의 기준들은 주관적이며 때론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일례로 저의 최애 카페 ‘고로커피로스터스(https://instagram.com/gorocoffeeroasters )’에서 구매한 원두와 드립백들은 제 기준에선 꼭 필요하지만 커피가 없다고 유럽여행이 불가능하진 않거든요. 하지만 온기와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입맛에 꼭 맞는 좋은 커피 한 잔은 삶에 ‘꼭 필요한 것(must-have item)’이란 제 생각에 동의하실 분들도 제법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없어도 되는, 있으면 좋은 것들(nice-to-have items)은 무엇일까요? 지금 제 기준으로는 읽을지도 모르는 책들과 입을지도 모르는 옷들, 먹고 싶을지 모르는 한국 음식들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와 여행지에서의 나는 꽤 차이가 납니다. 취향이나 입맛이 현지화된달까요? 아마 느껴본 적 있으실 거예요.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 가기보다 현지 조달하는 것이 훨씬 좋았던 기억이 많습니다. 가서 안 읽고, 안 입는 옷만큼 귀찮은 게 없어요. 그렇다고 버리고 올 수도 없잖아요? 한국 음식은 제법 유용할 때가 많지만 현지에서 입맛에 맞는 음식이나 소스, 향신료를 발굴할 기회를 사전 차단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보던 것만 보고 먹던 것만 먹어서는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없겠죠. 요약하면, 새로운 환경에 걱정이 돼서, 혹시 필요할까 봐 챙기는 짐들은 정말 ‘짐’이 돼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가방을 싸는 것이 제법 도움이 됩니다.
요즘 트렌드인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가져야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소비 중심의 자본주의 인간에게도 환경오염으로 앓고 있는 지구에게도 반가운 트렌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비워야겠다고 들면 내 안의 맥시멀리스트(maximalist)를 깨우게 되지 않나 싶어요. 관성의 법칙처럼 비워진 곳을 다시 채우고 싶은 본능이 살아나는 거죠. 그렇게 주기적으로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는 것이 과연 미니멀리즘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12kg, 55x35x25cm 규격에 맞춰 짐 싸기 미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충 싸서 도착해서 없음 말고 가 안 되는, 담아가는 물건 하나하나에 이유가 필요한 극강의 제이(J)스러움이 한 몫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의 과(過)함을 돌아보고 나만의 ‘must-have item’을 찾는 과정이 나름 꼭 필요한(must-have) 삶의 과정이라는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