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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Feb 19. 2023

Après la pluie, le beau temps

비온 뒤에 땅 굳는 것처럼 살아가기

하루 종일 비가 내린 파리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흩날리는 비로 시작해서 저녁부터는 쏟아붓기 시작했죠. 저는 제가 파리지엔느라도 된 양 우산을 쓰지 않다가 낭패를 봤어요. 비가 흩날릴 땐 굳이 우산을 꺼내 들지 않다가 쏟아붓기 시작할 즈음 꺼낸 우산이 바로 부러져버렸습니다. 20여분을 걸어가야 하는데 이미 머리도 옷도 푹 젖었습니다. 신발은 젖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네요.


문제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초대받은 저녁 식사 자리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함께 여행하는 친구는 물론 친구의 프랑스 가족들, 제게 머물 방을 제공해 주신 고마운 분까지 함께 하는 자리였어요. 하지만 빗속에서 부러진 우산을 고쳐보려다 결국 실패했을 땐 그냥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비는 그저 내릴 뿐인데 왜 그리도 짜증이 나던지요. 비도 싫고, 하필 고장 난 우산도 싫고, 옆에 지나가는 사람도 미웠습니다. 유치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에 짜증이 났어요. 그중에서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가장 짜증이 났습니다. 

Photo by Elric Pxl on Unsplash

이런 상태로 저녁 식사 자리에 가서는 분위기를 망칠 것이 뻔했지요. 이 상황이 곤란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렇게까지 화가 날 일인가 제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대답은 '아니요'이지만 감정이 쉬이 가라앉진 않았어요.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쳐다보다 무작정 걷기 시작했어요. 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서울 시내와 다르게 파리의 비 오는 밤거리는 가로등과 건물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전부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구글 맵에 의존해서 길을 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집이 더 가까웠다면, 택시를 탈 수 있었다면 이미 집으로 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집보다는 약속 장소가 더 가까웠고, 비는 퍼붓는데 택시는 보이지 않았어요. 다른 선택지가 없다 보니 계속 걸어갔는데 제가 생각보다 길을 잘 찾는 거예요. 이쪽이겠다 싶어서 움직이면 지름길이거나 복잡한 골목길에서도 헤매지 않고 가다 보니 5분만 길을 따라 걸으면 목적지였고, 어느 정도 기분도 안정되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습니다. 약속 시간에서 20분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는 제가 걱정된 친구의 전화였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다시 짜증이 나서 전화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다 왔다고 하고 끊어버렸어요. 표면적인 이유는 구글 맵을 볼 수 없다는 거였지만 실제 제 마음이 잘 추스러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친구의 전화를 나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 지각에 대한 질타라고 제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중요한 자리에 늦어놓고 친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혼자 그렇게 받아들인 거죠. 4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왜 문제 상황에 대처하면서 이렇듯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걸까요? 제 결론은 문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제 성향이 오히려 문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심하게 당황하고 자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 상황을 회피하다 보니 문제 상황을 실제로 맞닥뜨리는 경험이 부족하기도 하구요. 

Photo by Mitchell Griest on Unsplash

처음부터 어떤 것을 잘하기는 쉽지 않죠. 그런 사람을 우리는 천재 또는 신동이라고 부르잖아요? 어떤 일이든 어떻게 하는 지를 배우고, 연습을 통해 익숙해지면서 처음보다 잘하게 될 텐데요. 저는 그럴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던 겁니다. 저는 수영을 할 줄 모르고, 자전거는 작년에 배워 탈 수 있게 되었는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 배우다 몇 번 실패한 후 겁을 먹고 아예 포기해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수영장에서 허우적거리며 물을 몇 번 먹고, 자전거를 두 발로 젓다가 넘어질 뻔(넘어진 것도 아닙니다)한 이후로 그만둬버렸습니다. 이 또한 문제 상황을 인지하고 바로 회피해 버린 거죠.

Photo by Isaiah Bekkers on Unsplash

그날 저녁식사는 웃으며 마무리되었습니다. 비에 젖어 나타난 제 모습에 잠시 놀라셨지만, 모두 자신의 식사와 옆자리 사람과의 담소로 돌아갔구요. 저는 젖은 몸과 마음을 달래 보려 '김치찌개'를 시켰지만 - 식사 장소는 한국 레스토랑이었거든요 - 그 맛은 저를 달래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따뜻한 국물에 마음이 점점 풀어지면서 저도 앞자리와 옆자리에 계신 분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지요.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저는 무슨 일이 있었냐 싶게 안정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겨울의 파리 날씨가 그러하듯 저는 우산 없이 비를 여러 번 맞았는데요. 웃으며 비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 상황에 대한 경험치가 하나 더 생긴 걸까요? 우리말 중에 '비 온 뒤에 땅 굳는다'는 말처럼 프랑스 속담에도 "Après la pluie, le beau temps.(비 온 뒤에 날씨가 좋다.)"는 말이 있는데요. 궂은날이 있으면 좋은 날도 있다는 의미로 살짝 다른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비를 경험한 뒤에야 모든 날씨를 좋은 날씨로 느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제 나름 해석을 더해봤습니다. 파리에서의 비 다음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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