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일라 Apr 24. 2024

30년 만의 재회

뱃사람이었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이제 열심히 빗어 넘겨 반짝거리는 갈색 머리칼 대신 하얗게 서리가 내린 백발이 되었고, 이제 배 타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제 배 위에서는 그가 별로 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오랜 방랑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이라고 해도 자신을 알던 사람들은 거의 죽었거나 소식을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고향을 떠난 것은 이미 30년이 넘었지만 고향은 고향이었고, 남자는 이제 곧 그의 조카가 연안 근처에서 운영하는 호텔 옆에 있는 작은 방갈로에서 살게 될 것이었다. 피붙이가 없었던 남자가 축적한 적지 않은 재산은 이제 그 조카에게 갈 것이었으니, 남은 여생은 조카와 멀지 않은 곳에서 보내야 할 것이었다. 그날은 고향 도시까지 들어오는 배편이 없었기에 남자는 아래 도시에서부터 한참을 걸어야 했다. 고향의 초입에 도착할 무렵 남자는 그늘에 앉아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정오가 될 시간이라 해가 쨍쨍히 떠 있던 더운 6월의 여름날이었으니. 남자의 계획은 정오 이전에 고향에 도착해 조카의 집에서 아침 식사와 커피를 하는 것이었지만, 나이가 든 남자의 걸음걸이는 이제 느려졌을 뿐만 아니라 신중해져야 했다. 자칫하다간 여섯 달 전의 야간 산행 때처럼 삐끗한 허리처럼 되돌리기 어려운 몸이 될지도 모르니까.


남자는 초록 지붕에 엷은 연두색의 페인트칠을 한 벽돌집을 발견했다. 그곳은 시내 중심에서도 조금 떨어진 교외였기에 집이 많지 않았기도 하고, 밝은 건물의 색 때문인지 유독 그 거리에서는 튀어 보였다. 그는 그곳에 들러 물 한 잔을 얻고 깔끔하게 손질이 잘 되어 있는 정원의 파라솔 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이가 먹어 좋은 것 중 하나였다. 그럴 때면 남자는 바다 위를 거침없이 항해했던 자신의 과거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남자는 벽돌집 앞의 잘 깔리고 흙 하나 묻지 않은 돌길을 지나가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뒤에 중년의 여성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남자는 물 한잔과 잠시 쉴 곳을 부탁했다. 새벽부터 밑의 도시에서 걸어오느라 몹시 지친 상태임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중년 여성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곧 차를 내오겠다고 했다. 자신은 이 집의 관리인이며 지금 집의 주인은 긴 여행 중이라 자리에 없지만, 손님이 오면 기꺼이 맞이하라고 일러두었다고 했다. 남자는 기쁜 마음으로 정원에 있는 차양이 있는 테이블 곁에 앉았다. 잠시 뒤 물 한잔과 함께 따뜻한 차가 담긴 주전자, 초콜릿 칩과 견과류가 박힌 쿠키가 투명한 유리 쟁반에 담아져 나왔다. 노인은 감사를 표했고, 중년 여성은 찻잔을 들고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마님을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요. 늘 나그네들을 반기시죠."


"따뜻한 분이신가 봅니다."

남자는 차 한 모금을 삼켰다.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그렇기도 하지만, 여행 이야기를 듣는 걸 그렇게 좋아하셔요. 언제였는지, 지금 같은 날씨에 딱 이 자리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큰 여행짐을 짊어지고 가는 젊은이가 지나가기에 그를 불러 하루종일 그이의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었어요. 덕분에 그 청년은 3일 동안을 머무르면서 온갖 이야기를 다 했죠. 대부분은 그이가 만난 여자들 이야기였던 것 같지만요."


노인은 잘 손질되어 깔끔한 정원과 살랑거리는 화단의 꽃들이 빛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건물 쪽을 올려다보았다.


"지금도 출타 중이신 걸 보니, 여행을 꽤 즐기시나 봅니다.“


"마님이 여행을 가신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나서 상복을 벗자마자 열심히 계획을 짜시더니 어느 날 짐을 꾸려서 떠난다고 하셨어요. 우린 다 놀랐죠. 지금 시청에서 근무하는 큰아드님이 제일 반대가 심했지만 마님을 꺾을 순 없었어요. 종종 편지를 주시는데, 지금은 어디쯤이랬더라. 그저께 편지가 왔었어요. 마님의 옛 친구를 만났다던가. 뭔가를 말하셨는데. 편지를 다시 봐야겠어요. 이 나이가 되니 뭐든 금방 잊어버려요. 가만있자, 내가 안경을 어디에 뒀지..."


중년여성은 안경과 편지를 찾아 집 안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온기가 남은 차를 마셨다. 주전자에서 따른 두 번째 잔을 다 비울 때쯤에도 여성이 돌아오지 않자 노인은 조금 무료해졌다. 정원을 바라보는 것이 싫증난 그는 발의 먼지를 세심하게 턴 다음, 열려 있는 집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긴 복도의 어떤 열려 있는 방에서 중년여성과 젊은 여자의 대화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몇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응접실을 조금 둘러보는 건 실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넓은 방으로 들어갔다. 장작을 때지 않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난롯가 위에는 몇 장의 사진들이 있었다. 세 명의 어린아이들이 정원 잔디밭에 앉아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두 명의 여자아이와 한 명의 남자아이. 그 옆의 사진은 학사모를 쓴 남성이 옅은 미소를 짓고 두 사람- 아마도 부모로 추측되는- 과 찍은 사진이었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작은 키에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었고,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은 얼굴을 비스듬히 아들 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아한 중년 여성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의 사진은 얼굴에 보조개가 움푹 패일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짧은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이 분홍색 아기모자를 쓰고 있는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세 장의 사진들 뒤에도 몇 장의 사진들이 가려져 놓여 있었다. 이미 이 집안에 살았던 누군가의 생활을 엿보는 듯한 즐거움에 남자는 그 사진들도 살짝 들어서 보고 싶었으나, 허락 없아 섣불리 건드리는 것은 아무래도 실례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집 안에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어서 더더욱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세 장의 사진으로도 이 저택의 주인 가족의 단란하고도 다채로운 삶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근엄한 중년 남성은 남자와 동년배이거나 혹은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 것 같았다. 그 시대에는 모두가 일찍 결혼을 했다. 대부분은 부모나 친척을 통해 교류하게 된 집안의, 부모의 눈에 점잖고 아름다운 청년들을 만나는 것이 관례였으니까. 이 두 사람도 그렇게 만났을 것이다. 열정은 없지만 불평도 없는 결혼생활. 약속이라도 한 듯 건강하게 태어나는 세 아이. 자녀들이 자라 가는 것과 나이 드는 자신의 몸을 동시에 지켜보는 나날들. 아이들의 결혼, 이사, 출산. 그리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때 이른 죽음까지. 그는 잠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곳 안주인의 남편이 되어 자신에게는 없었던 그 어떤 이의 삶을 그려보았다. 그것들은 남자가 들여다봤던 사진들이 투영된 공상과 함께 재빠르게 지나갔다.


물론 이 중 어떤 것도 남자의 삶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즐거운 공상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때 남자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 저택에 살았던 남자의 삶은 만약 30년 전, 남자와 함께했던 그 여자를 받아들였다면 당연하다는 듯 주어졌을 수도 있는 삶이었다. 남자는 아주 가끔 그 삶에 젖어보곤 했다. 기억 속에서 나이 먹지 않는,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곱슬기로 살짝 헝클어진 밤색의 긴 머리. 빛을 받으면 에메랄드 빛이 나던 눈동자와 그 밑을 뒤덮은 주근깨의 여자. 무더웠던 여름날 강이 흐르는 길에서 자전거를 타다 지쳐 큰 참나무 아래에 드러누워 있던 날. 그녀는 눈을 감고 말했었다. 결혼하면, 시내 한복판에 작은 집을 얻어 살면서, 장이 서는 토요일에는 요리하지 않겠다고. 시장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사주고, 밤에는 우리끼리 와인을 한 잔씩 마시면서 한 주에 일어났던 가장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한 가지씩 말하자고. 그때 남자는 머리 위로 바람에 가지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토요일 저녁 미등이 켜진 단란한 아파트의 식탁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밤색 곱슬머리의 그녀와 함께 시내 한복판에 집을 사는 대신 거금을 털어 선박회사에 투자했고,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별과 달에 대한 동화를 읽어주는 대신, 별이 쏟아질듯한 밤하늘 아래 가무잡잡한 뱃사람들 옆에 누워 칠이 벗겨진 기타를 치며 그리움 가득한 노래를 불렀다. 남자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러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음을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번씩은. 살을 에이어 오는 사막의 추위 속에 몸을 떨 때나 거친 항해를 해야 하는 날은 그녀의 작은 희망들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아주 소박하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엄청난 것처럼 보였고, 그녀와의 단란한 삶의 꿈이 영화같이 그려지는 것이었다.


그녀와 남자는 모든 점에서 달랐으나, 한 가지는 같았다.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삶을 긍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 그랬기에 그들은 인생의 모든 것에 있어서는 주저함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포기해야 할 바로 그것이 서로임을 알았을 때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잊고만 싶었다. 서로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앞으로 이 눈동자가 담기게 될 세상에 자신은 결코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카페에서 만난 그들은 두 시간이 넘도록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서로 앞에 앉아만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남자는 매일 밤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매일 밤 그녀에게 돌아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할 거라고 되뇌듯 소리쳤다. 실제로 며칠은 그녀의 집 앞까지 찾아갔지만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여자는 남자와의 이별을 실감한 날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사촌의 집으로 도망치듯 떠나버렸다.그 이후 그들의 삶은 그들이 꿈꾸던 길을 순탄하게 열어보였다. 그들이 무참히 서로에게서 잘려나간 뒤 삶은 마치 엄청난 상실에 대한 막대한 보상금을 준비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시 건장하고 잘생긴 젊은 청년이었던 남자는 고급 여객기의 삼등항해사로 선발되었고, 여자는 직업학교를 마친 후 작은 회계사무소의 말단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 년 뒤 참석한 사촌의 결혼식에서, 말수는 적지만 성실하게 쌓아 올린 부와 명예만큼이나 자신에게도 성실하고 헌신적인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곧 약혼을 했다. 그것이 남자가 그녀에 대해서 들은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분명 나이가 많이 들었을 것이다. 남자가 아직도 그녀를 종종 떠올리거나 과거의 회한으로 묻어두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30년 세월이 지난 일이고, 그녀를 떠난 뒤에도 그에게 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남자에게 그녀의 존재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아주 다른 종류의 삶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때 중년 여성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바깥이 더워서, 좀 구경 중이었습니다. 문이 열려 있어서,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남자는 생각에 잠겨 있다 여인의 등장에 자신도 모르게 횡설수설했다. 그리고 이내 소파에 앉았던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실례라뇨! 잠깐 일이 생겨서 미안해요. 여기, 마님의 편지를 찾았답니다."


중년여성은 기쁜 듯 편지를 흔들었고, 돋보기 안경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남자는 잠깐 편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무언가를 생각한 듯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군요.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마님이 건강히 돌아오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혹, 돌아오신다면 저의 안부와 감사를 대신 전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럼요. 그래도 조금 더 있다 가시면 이른 저녁 식사를 준비해 드릴 텐데…“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남자는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지만 자신과 같은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주라고 당부한 여주인의 행복을 빌었다. 그리고 중년 여성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시내의 초입으로 가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년 여성은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잠깐 눈으로 좇다가 돋보기안경을 쓰고 남자에게 읽어주려고 가져온 편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친구에게.

나는 지금 막, 내가 건널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대륙을 넘었어. 결혼하고 나서는 늘 집을 떠나 배를 타고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들어 보고, 익숙함과 낯섬의 경계를 탐험해 보는 꿈을 꾸게 됐는데 그게 현실이 됐어. 내가 탄 여객선은 호화스럽거나 아름답지 않고, 오히려 촌스럽고 투박해. 오래되고 낡았지만, 그래도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과 세월의 흔적인 것 같아서 싫지는 않아. 오히려 좋기도 해. 배를 타고 돌아다니던 옛 친구를 떠올리게 해 주거든

바다 한가운데에서 맞는 밤은 아주 고요해. 그 암흑 속에서 무수한 별이 나를 내려다보는데, 그걸 보고 있자면 내가 살던 곳도, 나의 이름도, 아이들도 기억나지 않고, 아주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친구는 이곳을 항해하면서 그런 기분이었을까? 이런 것을 느끼려고 바다로 간 걸까? 자신이 사랑하던 것들이 아직 육지에 있을 때도 말이야. 내가 만약 젊었을 때 그 친구를 따라서 온갖 낯선 것을 만나고 모험을 했다면 내 삶이 지금과 많이 달랐겠지. 그래도 그건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야. 떠나올수록 나의 세 아이들과 내가 살던 아름답고 조용한 연두색 벽돌집이 더 선명해지거든.

그래도 좀 더 가보고 싶어.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그리운 옛 친구를 만나게 될지. “

.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사랑과 진리의 품에 안겨 떠나는 모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