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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Mar 11. 2023

영과 진리의 예배는 그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이름과 어떠함이 아닌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3-24)


모태신앙으로 자라 거의 30년째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생활 형식 중 기본으로 속하는 것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예배드리는 것이 나에게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전의 나에게 주일 예배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찬양을 부르고, 말씀을 듣고 새기고, 모임에서 그걸 나누고 사람들과 커피 한 잔 하다가 돌아오면 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예배가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나는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예배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영이신 아버지와 나의 영이 교통할 수 있는 시-공간 속에서의 체험이다. 그 안에서 다시금 아버지의 좋으심을 보고, 나의 자녀됨을 상기하고, 중보기도를 할 때 내가 기도하는 사람과 민족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 함께 거하게 된다. 내가 ‘좋았던’ 예배는 그런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카페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편안하고 좋은 것.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그 사람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들을 터놓는 것. 그리고 그의 마음을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찬양을 드릴 때 예배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바로 찬양에서 고백하는 가사의 내용 때문이다. 그러한 곡들은 가끔 찬양을 부르는 주체의 '연약함'을 강조하거나, 혹은 주체가 '다짐'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나의 연약함을 강조하는 것은 그분의 강함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짐하는 가사를 통해 나 자신을 고백하고 의지를 고취시킬 수도 있다.때로는 그러한 찬양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며 위로를 받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가끔 그 언어 속에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 찬양을 드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 찬양도 분명 어떤 주제나 말씀을 가지고 쓰였겠지만, 매일 그 가사를 아무런 생각 없이 부르게 된다면 영과 진리의 예배가 내게 열릴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가사의 어떠함이나 그것이 주는 분위기만이 예배를 결정짓는 것은 아닐 거다. 그런 점에서 내가 편협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예배할 때만큼은 나 자신의 어떠함을 성찰하기보다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르신 '영과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겠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영국의 예배자 스튜어트 타운엔드(Stuart Townend)의 '아름다운 구원자(Beautiful Savior)'를 소개하고 싶다. 이 찬양의 후렴부분은 이사야 9장 6절, 예수님에 대한 예언에서 "그의 이름은 기묘자(Wonderful)라, 모사(Counsellor)라,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God)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라, 평강의 왕(The Prince of Peace)이라"는 말씀을 옮긴 것이다. 또 다른 말씀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름들도 있다. 타운엔드는 예수님의 '많은 이름들'을 열거함으로서 우리가 그분께로 초점을 맞추는 찬양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Beautiful Saviour, Wonderful Counsellor (아름다운 구원자, 놀라우신 조언자)*사9:6

Clothed in majesty, Lord of history, (장엄함으로 옷 입으신 역사의 주인)

You’re the Way, the Truth, the Life. (당신은 길과 진리 생명이십니다)*요14:6

Star of the Morning, glorious in holiness, (새벽의 별, 거룩의 영광스러우신)*계 22:16

You’re the Risen One, heaven’s Champion (부활하신 천국의 전사)

And You reign, You reign over all. (당신이 통치하십니다) *계 11:15


https://www.youtube.com/watch?v=RSm6fdZHl5Q


정말, 이 찬양의 가사를 천천히 따라가며 불렀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이름들에서 그의 성품을 하나하나 느껴볼 수 있었다. 때로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면서도 나도 모르게 어떤 종교적 교리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을 때가 있다. 나의 실제 삶에서 교제하는 이가 아니라, 단지 종교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듣고 실제 삶에서 멀어질 때 대부분 그렇다. 그럴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에서 묘사하는 그대로 하나하나 불러보며, 그분의 ‘실체’를 그려가는 이 찬양에서 예배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다.


곡을 한 번 들어보시기를 권한다.

또한 타운엔드의 홈페이지에서 이 찬양을 쓴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I wrote this some years ago now. For me it was a conscious step to move away from songs that focus on us and our experience of worship, and focus on Him – so the chorus is just the names of Christ. I find it a little odd, and slightly worrying, actually, that at this time when more worship songs are being written than have ever been written in the history of the church, we have very few songs that just concentrate on describing Christ. We have lots of songs that focus on our feelings, our desires, but very few that shift our focus away from ourselves and our experience and on to Him – songs that reflect the great hymns of old like “Immortal Invisible God only-wise”.


"몇 년 전에 이 곡을 썼다. 그 때는 나에게 있어 우리 자신과 예배의 경험에 대한 노래들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의식적인 단계였다. 그래서 후렴 부분은 예수님의 이름들로만 되어 있다. 나는 사실 그것이 조금 묘하게 보였고 살짝 걱정이 되었었는데, 그 당시는 교회의 역사에 쓰여진 것보다 가장 많은 찬양곡이 쓰여지던 시기였지만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에 집중하는 노래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많은 찬양곡은 우리의 감정들, 희망들(desires)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경험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찬양은 극히 적다. "영원하시고 보이지 않는 지혜의 하나님"과 같은 위대한 찬송을 보여주는 찬양들 말이다."

 

출처: https://www.stuarttownend.co.uk/song/beautiful-saviour/


한국의 많은 찬양팀도 타운엔드가 느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이름과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찬양들을 지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로 쓰이고, 우리 민족의 정서와 고백을 담은 고유한 찬양들이 얼마나 귀한가 하고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부흥한국의 찬양을 좋아한다. '나'가 아니라 이 '나라'와 '세계' 그리고 그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넓은 시야를 그리며 예배할 수 있는 곡들이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좋은 가사와 멜로디의 찬양보다 중요한 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보다 예배자 그 자신이다. 예배자가 하나님 그분의 크심에 삼켜져서 나의 어떠함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하루 종일 그분과의 시공간(영)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진리)를 자유로이 노래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설 때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고 있었는지 밝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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