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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Oct 03. 2023

친구, 뛰어난 지혜를 넘어선 숨은 무기

아렉 사람 후새와 아히도벨 이야기 

우리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가까이 있는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나의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 "자신의 고민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같이 있을 때 편한 사람", "자주 만나거나 안부를 묻는 사람", "더 나은 모습으로 함께 발전해가는 과정을 함께하는 사람", "따지지 않고 믿어주는 사람"... 전부 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변들이었다. C. S. 루이스도 우정에 대해서 "같은 진리를 공유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든, 고민이든, 믿음이든, 무언가를 결국 '같이함'인 것이다. 어떤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의 친구들을 잘 살펴보라는 격언도 있지 않던가. 나의 친구들은 나라는 사람을 반영하는 모습이 있는 셈이다. 


사무엘하 15:32 | 아렉 사람 후새가 자기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그를 맞으러 오므로

15:37 | 다윗의 친구 후새가 도시로 들어가고 

16:16 |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등장인물: 다윗, 압살롬, 후새, 아히도벨 


https://mybible.com/bibles/esv/books/2sa/chapters/16

여기 자신의 아들의 반역에 쫓겨간 늙은 왕 다윗이 있다. 청년의 때에는 기름부음을 받고도 선왕 사울과 수많은 적들에게 도망하더니 평화로워야 할 노년에도 도망자 신세다. 사울 왕과 원수지은 것이야 그렇다 쳐도, 자기 아들의 칼을 피해 도망하다니?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다. 보라(behold)! 어떤 노인이 멀리서 달려오고 있다. 사무엘하의 저자는 달려오는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아렉 사람 후새(Hushai)다. 자신의 옷은 슬픔에 찢겼고 머리에는 흙이 엉겨붙어 있다. 그는 누구이기에 다윗 왕의 심정과 같이 애통하며 이리로 오고 있는가. "다윗의 친구 후새"라고 일컬어지는, 왕의 친구다.  


친구! 그 단어는 어떤 그림이 되어 나를 사로잡았다. 전쟁 가운데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 나와 한편이 되어 싸우는 다른 병사들이나 선봉에서 싸우는 장군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이 전쟁을 이기기 위한 한 편이 아니라, 언제든지 나의 편으로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그 아렉 사람을 자세히 보기로 했고, 이 글을 적기로 했다. 


1. 다윗의 '친구' 


다윗의 친구 하면 흔히 요나단을 떠올린다. 다윗도 요나단이 자신을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다고(삼하1:26) 여겼을 정도로 요나단은 특별한 친구였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관점이라기보다는 그의 짧은 생에 대해서만은) 아버지를 잘못 두었던지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일찍 다윗의 곁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후새는 노년에도 다윗의 '친구'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다. 추정컨대 요나단보다는 더 오랜 날을 함께했을 것이라 다윗을 잘 알고 있었고 다윗도 후새를 잘 알았을 것이다. 달려오는 후새의 마음은, "아이고! 우리 노왕이 이제 좀 편하게 살아보나 했더니만 자식놈에게 쫓겨오다니 이게 왠 날벼락인가!"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꽤나 각별한 사이인 것 같다. 다윗은 후새에게 자조치종이든 푸념이든 터놓을 새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짐이 되리라"(삼하 16:33). 주석에 후새는 다윗 왕과 같은 노인이기에 전쟁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으리라 추정한다*. 번역하자면 "노인네가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딜 따라가려 그러나." 하는 애정과 걱정이 섞인 말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친구이기에 이런 부탁도 한다.  "내 아들에게 가서, 너의 아버지의 종이 되었던 것처럼 내가 이제 당신의 종이 되겠다 해라. 그러면 압살롬이 뛰어난 아히도벨이 아니라 오히려 너의 말을 듣겠지 싶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사실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내는 것은 다윗에게도 큰 도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들에게까지 배신을 당한 다윗 왕이 지금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탄생부터 먹이고 입히며 키운 혈육마저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데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배신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을까? 게다가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제까지는 자신을 왕이라 하던 백성들이 너무나 짧은 시간에 압살롬에게로 돌아섰다. 내가 다윗이었다면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도 못 믿겠다며 일찌감치 드러누웠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왜입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 시간에도 하나님 안에 거했고 상황을 하나하나 돌파해 나간다. 그리고 때에 맞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친구에게 중요한 일을 맡긴 것이다. 이 절망스러운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중요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늙은 친구로 하여금 돕도록 준비시키셨다. 

압살롬에게 조언하는 아히도벨과 후새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P_1937-0915-76


후새는 다윗의 부탁에 즉각 순종해서 압살롬에게로 간다. 사실 이러한 위장 배반이 위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는 왕의 친구라고 일컬어지는 최측근 아니던가. 그러나 압살롬이 의심한다면 단칼에 죽일 수도 있을 만큼 근거리로 접근한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압살롬이 들을 만큼의 큰 소리로 "국왕 폐하 만세(God save the king)"를 외친다(삼하16:16). 어쩌면 이 노련함과 위험을 무릅쓴 용기는 아히도벨보다 한 수 위였으리라. 압살롬은 아버지의 친구 후새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후새에게 비웃듯 한 마디 던진다. 


"이것이 네 친구에게 베푸는 네 친절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16:17)

 

말하자면 후새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 친구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친구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친구 편을 안 들고 나한테 올 수 있는가 하는 말을 비꼬아 던진 것이다. 여기서 후안무치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인물인 압살롬이 타인의 배반을 보고 혀를 찰 정도라면, 후새와 다윗은 꽤나 각별하고 가까운 친구였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압살롬은 몰랐다. 자신이 헤아리지 못한 신뢰와 쌓아보지 못한 깊은 우정이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망하게 할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2. 뛰어난 브레인 아히도벨에게 단 한 가지 없던 것 


압살롬이 기세등등하게 다윗 왕을 대적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아히도벨이다. 아히도벨도 원래 다윗 왕의 조언자였다(역대상27:33). 제갈량보다도 더 뛰어난 책사임이 분명한 것은 그의 조언이 마치 "하나님의 신탁을 받는 곳에서 묻는 것처럼"(삼하16:23) 뛰어났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수식어가 붙는 총리가 어디 있을까? 얼마나 지혜롭고 똑똑하면 그가 제안하고 내다보는 모든 일마다 신이 그에게 알려주는 것과 같다고 하냐는 말이다. 게다가 23절 후반절에는 이 조언이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같다고 (굳이) 덧붙이고 있다. 압살롬에게 갔다고 해서 그가 어리석게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윗 왕은 아히도벨의 능력을 너무 잘 알았기에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조언이 어리석음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 그리고 나서 후새가 압살롬 편으로 위장 투입된다. 


아히도벨과 압살롬 https://dwellingintheword.wordpress.com/2021/06/29/3182-2-samuel-16/


그러나 아히도벨은 자신의 너무 뛰어난 지혜와 통찰 때문인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 왕의 첩들과 성관계를 맺도록 조언한다. 이는 다윗 왕의 통치권뿐만 아니라 자신의 왕궁과 가정의 권위마저 아들에게 빼앗긴 것을 의미하고, 이로 인해 다윗 왕 또한 압살롬을 대적할 것을 백성들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얼마나 성공적일지를 떠나서, 이 얼마나 악한 조언인가. 아히도벨은 반역의 성공에 눈이 멀어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지금껏 지혜로웠던 자신의 능력에 눈이 멀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하시는 분이시다(고전 1:27). 아히도벨이 하나님께 듣고 말하는 것처럼 지혜로울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지혜를 넘어서 인간을 잘 아시는 분이시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지혜가 될 수 있다. 바로 압살롬이 후새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후새도 엄연한 다윗의 모사였으나, 그 지혜와 통찰만큼은 아히도벨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압살롬은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아히도벨의 조언을 무시하고, 결국은 다윗 왕의 군대에게 시간을 벌어줄 후새의 조언을 따른다. 물론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제안했지만 말이다. 압살롬이 후새의 말을 듣자 아히도벨은 패배를 직감한다. 그리고 반역자로서 붙잡힐 자기 자신과 압살롬의 군대가 스쳐지나간다. 아, 우리는 패배하겠구나. 그리고 그 길로 집에 돌아가 목을 맨다. 


아히도벨의 자살은 또한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자신의 지혜가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 되고 패배를 직감했을 때 아히도벨은 삶의 큰 좌절을 맛보았다. 그의 인생은 자신의 지혜로 성공적인 삶이었으나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을 잃고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세상 최고인 자신의 지혜가 때로는 가까운 벗 하나를 두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히도벨은 무너져내린다. 적은 나이가 아니었던 아히도벨은 충동적으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믿어왔던 자신의 지혜, 곧 자신의 존재와 생애가 통째로 부정당한 것이다. 그것은 곧 다가올 압살롬의 패배에 앞서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패배였던 것이다.


3. 지혜를 이기는 강력한 무기 


아히도벨의 뛰어남은 압살롬의 편에 섰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편에 서서 승리를 가져다줄 계략을 성의껏 만들어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버지 친구의 말을 들었다. 게다가 후새는 다윗을 잘 아는 친구 아닌가. 다윗왕이 화가 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압살롬의 의중에는 "친구였던 우리 아버질 배신할 정도면 나에게 정말 진심이겠지. 여기서 절대 지면 안되니까 말이야. 여기서 지면 나도 후새도 잃을 게 너무 많다고. 어떻게 아버지 얼굴을 다시 보겠어?" 하며 후새의 조언을 더 신뢰한다. 결국 뛰어난 지혜였던 아히도벨은 왕의 친구였던 후새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압살롬과 후새https://obscurecharacters.wordpress.com/2015/05/04/hushai-king-davids-friend/ 



왕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아빠 친구의 말을 더 신뢰해 버린 탓에 뛰어난 전술가이며 오른팔이었던 아히도벨의 가치를 잊어버리게 된다. 전세 역전의 패는 왕의 늙은 친구 후새가 쥐게 된 것이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셨다. 그렇게 압살롬의 군대는 패했고 (어이없게도!) 미남의 상징이던 풍성한 머리칼이 나무에 걸려 요압의 창에 목숨을 잃는다. 다윗 왕은 뛰어난 지혜자 대신 자신에게 충성된 종이며 자신을 아껴주는 친구인 후새로 말미암아 역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혜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신실한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가? 다윗과 후새의 이야기를 통해 지혜는 언제든 잘못된 편에 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더 어리석고 악한 것이 되지만, 선한 편에 서서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우정을 나누는 것이 때로는 세상의 지혜를 이기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이 보여진다. 친구. 햇볕 쨍쨍한 사막 한 가운데 견고하게 뿌리내려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와 같은 존재. 전쟁터 한가운데에서도 내 옆에 있다면 그것으로 일단 마음이 놓이는 존재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가 반지를 옮긴 것은 샘 감지가 없이는 결코 불가능했다. 사실 샘이 다 했지! 프로도가 잘한 일이라곤 샘을 데려간 것뿐. 신실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결코 조연도, 단순한 조력자도 아니다. 전세 역전의 패이고, 숨은 영웅이며, 약속을 완성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resources:

https://biblehub.com/commentaries/gill/2_samuel/1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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