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앙일기

고통의 시간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믿음을 생각하다

by 아일라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무력한 새해는 처음 맞이해보는 것 같다. 이전 해가 끝나갈 때부터 아무런 감흥이 없더니 새해가 되어도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런 느낌에 한층 더 무력감을 얹기라도 하는 듯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목이 따끔거려서 목감기가 오려나 하고 있었는데 12월 31일 저녁부터 몸살기운이 몸을 덮치면서 열이 올랐고 신정 연휴 이후 이틀간은 출근도 못 했다. 2025년의 첫 주는 병상에 누워 아무 것도 못하고 잠을 자거나 겨우 밥을 먹고 주변을 정리하는 일, 핸드폰을 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아프게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힘들었다. 특히나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내오면 그것을 읽고 거기에 답장을 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아프기 전에는 어떻게 이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매일 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전화통화로 하는 간단한 대화도 힘들었다. 뭔가 할말을 생각해내고 그것에 대해 길게 말을 하는 것이 잘 되지 않았다. 상대방의 반응이나 눈치를 살펴서 그에 맞게 말을 하는 것이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일 같이 느껴졌다. 또 아프기 전에 주말마다 항상 약속을 잡고 단장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던 것을 떠올렸다. 매번 밤늦게 집에 늦게 들어오던 걸 생각하면 아프기 전에는 내가 체력도 사람에 대한 열정도 많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프고 나니 철저히 혼자였다. 그리고 혼자여야만 했다. 아픈 모습을 누군가와 굳이 공유하고 싶지도 않고,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라서 힘든 부분들이 있지만 혼자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 있다고 해도 내 몸에서 일어나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대신 싸워줄 수는 없는 거니까. 홀로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혼자 있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고, 혼자서도 잘 지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 아니었다. 단 며칠이지만 혼자 있어보니, 나는 그동안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해 무지 애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 자신과 또 나 자신이 하나님과 독대하며 보낼 수 있는 귀중한 시간들을 주위를 살피느라 허비했었다. 누군가의 기대의 부응하려 애썼고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 스스로를 꾸몄고, 그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게 잘 대해주지 않을 때 실망감을 감추려고 애썼던 시간들이 있었다.


물론 함께 살아가려면 그런 것이 어느 정도는 필요할 듯싶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중심부를 흔드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실은 그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누군가와 함께하면 나는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누군가와 함께하지 못하는 날에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면서 우울해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 시간을 맞추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이 썩 지혜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었을까? 그러한 삶은 딱히 나 자신을 위한 것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도, 어떤 대의를 위한 것도 아니었던 듯하다. 그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채워지는 것들을 갈망하고 그것으로 하루하루를 만족하면서, 또는 불만족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러면 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우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탁하려 했던 그 모든 다리들을 끊어 버리는 것.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챙기는 그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자 있는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그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무력한 이 삶을 다시 한번 천천히나마 세워 나가는 것이다. 어쨌든 주어진 이 삶을 주신 이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니겠는가. 더 이상 토기장이에게 불평 말고 그가 의도하신 대로 내 삶을 세우는 것. 다시 한번 모든 관성을 이겨내고 이 짧은 삶에 맡겨진 것들을 게으름 없이 하나하나 이루어가며 살아가는 삶. 사실은 내 깊은 내면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것을 마음 다해 원하고 있다.





열이 오르고 몸살기운으로 온몸이 쑤시는 듯한 통증으로 고생할 때에는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와주세요. 고쳐주세요까지도 가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내 자신이 간절한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그것을 묘사하고 간구할 만한 어떠한 단어나 문장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저 깨지고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마치 다 아시면서 침묵하고 계신 것만 같았다. 무관심하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아픈 내내 그분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안개 속에 계신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 실망하고 그분을 떠나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어제도 우연히 누군가가 "하나님께 기도해도 응답하시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자신이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응답해주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야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 입장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셔서 우리가 그분을 믿게 해주라고, 아픈 내가 병상에서 나를 고치는 손길을 느껴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돌보심을 믿게 해달라고, 어제 그 믿음을 갖지 못하는 여자에게 안개가 걷히듯 나타나 믿음을 주어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오래도록 말이 없으시다. 어떠한 특별한 도움도, 도움을 받는다는 느낌마저 없다. 그것은 이내 내 마음을 찢어 놓는다.


내가 그렇게 마음이 상하고 도움을 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이제는 스스로 괜찮아지라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믿음은 어디에 기반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나의 어려운 시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무정하다고, 응답하지 않으시니 없으신가 보다고, 그의 선하심이나 신성을 의심하며 저버릴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사실 사람이 내게 그랬다면 그가 나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실망하여 떠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다. 인간을 대하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대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깨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지 ‘나의 입장, 인간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려는 태도다. 만물의 주재이시고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입장이라는 것이 그렇게 믿을 만한 척도가 아니며 견지해야 할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볼 수 있듯 자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으로까지 자신의 눈높이를 낮추셔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상대하듯 우리를 대해 주셨다. 그러나 결코 다른 인간이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해 주신 것은 그가 신이기 때문이다.


나도 하나님이 왜 침묵하시는지 모든 이유는 다 알지 못한다. 또한 그렇게 침묵하실 때 내 마음도 다른 이들과 같이 똑같이 찢어진다. 그분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고,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는지는 그 앞에서 너무도 쉽게 잊히며, 지금 당장 나를 살펴 주지 않는다는 원망감이 앞서 이전의 은혜를 쉽게 잊는다. 그러나 조금 더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그 침묵이 결코 무관심이나 무정함에서 비롯된 침묵이 아니라, 오히려 인내하는 침묵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그 시간 동안 흔들리는 내 기반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하는 그런 시간. 그런 의미에서 그분도 인내하고 계셨던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음은 과학적 가설을 세우고 증거들이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뒷받침될 때에야 갖는 것이라거나 반대 증거들이 많아질 때 그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성경에서 ‘믿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는 ‘피스티스’다. 피스티스의 뜻을 찾아보니 “설득, 신용, (하나님의 신실성을) 확신, 구원에 대해 그리스도를 신뢰, 직업에서의 꾸준함“(픽트리성경)등이 나왔다. 믿음은 우리가 그것을 믿을 만할 때 믿고, 믿을 만하게 되지 않을 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붙잡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무턱대고 확신하라, 묻지 말고 믿으라는 그런 종류의 맹목적 믿음은 아니다. 그 믿음을 가지는 대상이 누구인지 다시 보고, 그를 믿는 것이다. 그분은 신실한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신실함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달린 십자가로서 우리에게 전해졌고 나타났고 그것을 믿은 바 된 우리들에게 확증된 것이다.


여러 가지 낙심할 수 있는 상황과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우리가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인공의 삶을 살고 있기에 그렇다. 우리의 믿음과 도전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세계와 우리의 감각을 뛰어넘는 모든 일에 준비가 되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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