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요셉의 첫 번째 인내: 보디베라의 집

이집트의 요셉 (1)

by 아일라

요셉은 마치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듯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손이 묶여 끌려갔다. 가는 내내 요셉은 여러 가지 후회와 절망에 시달렸을 것이다. 끌려가는 요셉의 마음은 이러했을 것이다.

"도대체 형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처음에는 거의 죽이려고 했어. 유다 형이 팔아버리자고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죽고도 남았겠지. 어째서 나는 그런 꿈을 꾸고 경솔하게 떠벌려 형들의 시기심과 분노를 부추긴 걸까. 하필 그 날 아버지는 어째서 형들을 보고 오라고 시킨 걸까.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나한테 그러실 수 있지? 그런 꿈을 꾸도록 두신 것도 모자라서, 형들이 무서운 계략을 꾸며서 나를 죽이려 하고 이 사람들에게 나를 팔아넘길 때도 막아 주지 않으셨어. 하나님은,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나타나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한 그분이 아니었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은혜를 베풀어 너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리라 약속한 분이 아니었나? 그런데 나는 이제 그 모든 것에서 끊어진 것처럼 되었다...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먼저는 자신에게 끔찍한 일을 한 형들, 어느 정도 명분을 제공한 자기 자신, 그리고 하필 그 날 자신을 멀리 보냈던 아버지 야곱,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다 보시면서도 그대로 두었던, 자신에게 꿈을 꾸도록 했던 하나님에게까지.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날 수많은 “만약”을 생각하면서 잘못 끼워진 모든 것들을 한탄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그에게 분명히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광풍과 같은 시련과 이해되지 않는 고난 사이에서 성경은 그가 어떤 독백을 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의 모든 감정은 마치 철저하게 가려지거나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 감정을 내보이는 순간이 있지만, 고난의 한가운데에서만큼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다(때로는 우리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인데 말이다!).


요셉이 이집트로 오고 난 이후부터 그가 자신의 꿈을 평소 자신을 미워하던 형들에게까지 눈치없이 떠벌릴 때와는 다르게 놀랍도록 과묵하고 잠잠하게 모든 시간을 보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실제로 요셉의 성격이 바뀌었는지, 기록될 만한 증거가 없었든지, 의도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요셉의 시련이 시작됨과 동시에 누군가의 개입을 보게 된다. 그야말로 적극적인 개입이다. 그는 바로 하나님이다. 어쩌면 요셉은 그의 시련 앞에 입을 다물게 됐거나, 성경은 하나님의 개입과 일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요셉의 심경은 어느 정도 배제했으리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 경호대장의 집으로 보내시다


브루스 K. 윌키와 캐시 J. 프레드릭스의 창세기에 관한 주석에서, 요셉의 장에서는 “모든 일이 정확한 때에 발생한다.“고 말했다. 요셉이 형들을 찾느라 세겜 주변에서 시간을 허비하였기 때문에, 이스마엘 사람들이 요셉이 구덩이에 빠진 그 때에 정확하게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하나님은 요셉을 구덩이에 빠지게 두셨으나 그의 생명만큼은 보존하셨고, 바로 그 시간에 지나간 이스마엘 사람들과 함께 그를 가게 하셨다. 그리고 그의 다음 챕터가 시작된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창 39:1)

그가 노예 신분으로 이집트에 도착해 처음으로 가게 된 곳은,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이었다. 경호대장은 왕을 호위하는 최측근 인사이니 당연히 왕의 총애가 없으면 오를 수 없는 자리일 것이고, 때문에 이 보디발이라는 인물은 상당한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집의 노예가 된 요셉은 슬퍼하거나 한탄할 시간도 없이 보디발의 집과 관련된 허드렛일부터 제반 사무, 행정까지 배워야 했다. 가나안 땅에서는 노예가 아니라 왕자 대접과 종의 시중을 받았을 요셉이 이제는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되었다.


이 때 야웨(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39:2)


그러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보디발의 집에 있는 요셉에게 말이다. 그는 어디 계셨던 걸까? 형들의 계략으로 구덩이에 빠졌을 때도, 아라비아 상인에게 팔려갈 때도 나타나지 않던 하나님이다.

물론 모든 것은 그의 손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요셉이 어려움을 당할 때 마치 계시지 않는 듯하던 하나님이었다. 때론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때가 있지 않나. 올라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빠졌던 요셉처럼, 분명히 이 어려움에서 나를 건지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그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깊은 어둠 속에 갇힌 것만 같은 때가. 그러다가 내가 겨우 이 어려움 속에 발붙이고 살아갈 때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는 때가.

요셉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한다. 이는 그가 가나안 땅에서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살 때도 누려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철부지로 살아왔을 때는 결코 경험한 적 없던 하나님을,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받는 귀공자 아들에서 아무것도 없는 노예로 전락한 요셉에게 오셔서 그와 함께하셨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인간이 선택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러기로 선택하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뛰어나고 지혜가 있는 자라도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해서 세상의 지혜 있는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세상에서 뛰어나고 좋은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을 약한 사람들을 돕고 쓰심으로 세상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고전 1:27).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약하고 어려운 상황은, 하나님의 강하심과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도 하나님은 보디베라의 집에서 그를 훈련시키셨다. 이집트라는 제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경험하도록 하시고 보디베라의 모든 집을 다스리는 권위를 부여받음으로 요셉은 모든 그 큰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무와 행정, 일꾼들의 관리, 식량이나 물품 등을 들여오거나 보관하는 것 등 모든 것들을 직접 다스리고 배웠다. 오직 보디베라의 까다로운 식단만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것들을 자신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2. 보디베라, 하나님을 아는 자


이집트의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한 권위자가 천한 히브리 노예에게 자신의 집을 관리하고 다스릴 모든 권위를 준 것은 우연일 수 없다. 어떻게 보디베라는 이집트 사람도 아닌 외국인에게, 그것도 이집트인들이 멸시하던 히브리인에게 자신의 집에 대한 모든 권리를 줄 수 있었단 말인가. 나중에 나오듯이, 이집트 사람들은 히브리인들과 같이 먹는 것이 부정하다고 여겨 겸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창 43:32). 그러나 보디베라가 모든 예상을 뒤엎고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그가 무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예에게 함께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이해할 만한 마음을 지녔다. 혹은 이방인임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도록 영의 눈을 열어 주셨음이 분명하다. 보디베라가 원래 하나님을 알 만한 영을 지녔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셨든지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그의 집에 보냄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이루어 가셨다.


그래서 요셉이 보디베라의 집에서 보냈던 이 시간은 장차 그가 온 이집트를 다스리는 총리로서 보낼 시간을 예견하는 듯하다. 그는 대제국이었던 이집트 땅에 노예로 거하면서, 가나안 땅에서 이전처럼 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형들과 양을 치며 살아갔다면 결코 배우지 못했을 것들을 배우게 된다.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이집트의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었고 그의 집까지 다스리는 권위를 가졌다. 이는 보디베라에 의해 주어졌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드러내셔서 요셉의 삶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형들이 미워하여 짓밟으려고 했던 그의 꿈은 그가 만일 아버지의 집에 편안히 거하면서 지냈더라면 철없이 뻐기기를 좋아했던 소년의 한낱 개꿈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이 오히려 이집트로 오게 되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 아래 이루어지는 전조를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요셉의 이야기를 풀 스토리로 보고 있기에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 놀라고,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의 엔딩에 비추어 "이때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때의 요셉은 감히 그런 것을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 때로 이해되지 않는 고난 앞에서 놀라고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찾아간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것을 내 인생에서 제하여 달라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고난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은 하필 그 때에 자리를 비우신 것처럼 느껴진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언가 일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나? 전화를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는 사람이 사실은 내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상상할 수나 있느냔 말이다.



그럼에도,이 시간이 낮아짐을 경유하여 보내는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여전히 형들 가운데 아버지의 높임 가운데 살아갔더라면,


그는 가나안에서의 삶처럼 모든 것을 하나 하나 새로 배우며 지혜와 기지를 발휘하는 법도,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보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법도 몰랐을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신을 섬기는 대제국의 절대군주인 파라오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요셉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3. 보디베라의 집에서의 시간이 끝나다


요셉이 이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장차 이 이집트 땅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사람이 될지를 다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아침에 일어나면 노예인 자신의 신분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묵묵하게 처리하다 밤에 잠이 드는 순간 그리운 고향 땅과 아버지의 꿈을 꾸고, 자신을 배신한 형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날들도 그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이해되지 않는 나날이 계속해서 지속되지는 않았으리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는 그 이해되지 않음에서 오는 고통과 원망이 조금씩은 무뎌지는 것 같은 때를 보냈을 것이다.


비록 배신당해 노예로 팔려왔지만 이제는 한 권위자의 집에서 사무를 보는 대표 집사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고 안정되는 듯 보이는 그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들에서 조금씩 벗어난 요셉의 삶을 다시금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이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요셉은 보디베라의 집에서 그의 총애를 받으며 그럭저럭 편하게 살아갔을 수도 있다. 그 집에서 여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보디베라의 추천서를 받아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비록 시작은 비참했지만 이제는 강대국에서 그럭저럭 성공하고 적응한 외국인. 보디베라와 같은 관직까지는 노릴 수 없지만 그래도 높은 사람들을 섬기면서 나쁘지 않은 삶. 그게 요셉의 인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인생의 끝은 결코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는 마치, 하나님이든 누구든 요셉을 편하도록 두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도 든다. 그에게 벌어진 또 다른 하나의 사건, 이번에야말로 너무나 억울한 사건이 그에게 벌어졌다. 이제 요셉의 보디발의 총애를 받는 하인으로서도 집의 관리인으로서의 시간이 끝나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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