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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Oct 17. 2021

1km 수영 방법: 우선 25m만 가봅시다

첫 번째 수영일기_나의 존재는 지금 여기의 힘찬 움직임에 있다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번 강습이 있는데 평균적으로는 두 번 정도 가는 것 같고, 자유수영도 일주일에 두 번은 가는 것 같다. 그러니 일주일에 3일 이상은 수영을 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국 전부터 배우기 시작해 드문드문 다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4가지 영법을 구사한다고는 할 수 있게 되었고(접영은 아직도 코어 근육에 힘이 없어 힘겹게 하는 수준이지만) 레일을 돌면서 중간에 쉬는 횟수도 처음보다는 현저히 줄었다.


강습이 없는 날 수영을 하러 갈 때는 25m 레일에서 1000m, 즉 20바퀴를 도는 것을 최소 목표로 삼았다. 코로나나 이사, 여행 때문에 다니지 못했던 기간이 중간중간 꽤 길지만 그래도 수영을 시작한 지 거의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 정도는 해야 운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잡은 목표치다. 그런데 20바퀴를 도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수영을 시작한 후 숨이 차오르고 그래도 꽤 돌았다 싶었을 때 스마트워치를 보면 250m 정도밖에 찍혀 있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럴 땐 ‘오늘은 아무래도 20바퀴는 무리야. 800m만 돌아야겠어. 사실 그 정도도 쉽지 않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런 생각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25m를 가는 것도 힘들어진다. 팔을 들어 올리고 발을 차는 것도 힘든데 호흡을 신경 쓰지 않으면 숨이 찬다. 수영할 때 무엇보다 힘든 건 아무래도 호흡하는 일일 것이다. 물 속이라 그런지 몸을 움직이는 건 덜 힘들게 느껴지지만, 호흡이 가빠지면 별 생각이 다 든다. 생명의 위협까지는 아니지만 머리가 마비되는 느낌에 그저 하나의 생각뿐이다. ‘지금 당장 물 위로 올라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럴 땐 '그래, 우선은 저 끝까지만 가보자'고 생각한다. 우선 저 끝까지는 도착해야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니까. 그리고 끝에 가서는 다른 쪽 끝까지만 가보자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래, 딱 거기까지만 하자. 그리고 조금 쉬거나, 아니면 오늘은 이쯤 하지 뭐. 하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러다 보면 지치고 쉬고 싶던 내 몸은 한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도착해 있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오히려 몸이 적응을 한다. 처음 3바퀴째 돌 때보다 나중의 13바퀴쯤 돌 때가 훨씬 수월해진다. 이미 힘들 때 바라보던 한쪽 끝까지의 목표는 달성했기에 언제 쉬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발을 차다 보면 어느새 800m 정도는 가 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200m는 오히려 쉬워진다. 4바퀴만 더 가면 되잖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힘이 덜 드는 평영을 한 번 하면 수월하게 한 바퀴. 자세 교정과 연습이 필요한 접영을 시도하다 힘들어서 자유형으로 돌아오면 또 한 바퀴. 그렇게 하다 보면 1000m를 채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루틴으로 수영을 하던 어느 날 우리가 하는 일도 이 레일을 도는 것과 어쩌면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내가 처음에 설정했던  1000m에 해당하는 목표가 있을지도 모른다(1000m가 아주 무난하게 느껴지는 수영인도 있겠지만…). 논문 발표하기, 시험에 합격해서 원하는 직업인이 되기.. 혹은 그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목표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멀리 있는 것이라면, 당연하게도 단번에 그것을 성취할 수는 없다. 우선은 그곳에 닿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그것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혀야만 하는 일이라면, 숨이 가빠와서 지금 당장 포기하고 싶은 첫 단계들을 지나야 만 하는 것이다. 0m로 출발하는 지금은 1000m라는 숫자가 아득해서 더 힘들게 느껴지기도 한다. 애초에 닿을 수 없는 목표가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주 힘들면 그런 생각만 든다.


그럴 때는 우선 ‘저기까지만’ 하고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1000이라는 숫자가, 너무 멀리 아득하게 있는 목표가 지금의 나를 압박하면, 당장 앞으로 나가는 일마저도 힘들고 의미 없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니까 당장 1000미터를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볍게 하고, 눈앞에 보이는 저기 저 벽까지만 가자고 생각해보자(왜 단계적으로 계획을 짜라고 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가 딱 저기까지 갈 수 있는 힘은 남아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내딛을 수 있는 힘까지도 말이다.




그러나 내가 수영의 경험에서 삶을 깊이 생각해보게 된 이유는 단기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 달성에 도움을 준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수영을 할 때만큼은 생각회로가 멈추고 오직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온몸을 움직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시선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지 않고 고정하게 되니 다른 어떤 복잡한 것을 생각할 수도,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하게 된다. 그저 ‘앞으로 나가는 일’ 이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딱 25미터만을 나아간다. 1000미터는 잊어버린다. 내가 원하는 곳에 있게 되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의식하다 보면 오늘 하루에 일어나는 일들, 지금의 한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서 스스로와 타인들에게 실패자로 비춰질까 불안한 내면 깊은 곳의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멀리 내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잠시 미뤄두자. 목표를 상기하며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일이나 채찍질을 하는 일은 이미 충분히 해 왔을 거고, 필요하면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목표는 지금의 나 자신이 아니다. 심지어 목표에 도달한 이후에도 그것 자체가 나 자신은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1000m를 도달하고 물 밖으로 나오면 나는 또다시 다음의 1000m, 1200m를 감당하러 가야 한다. 정확히 나의 존재는 내가 삼은 목표에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여기, 지금 나의 힘찬 움직임이 만드는 파동과 내뱉는 숨들이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그것들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건 그런 것들이다. 1000m라는 잘 설정되고 번듯한 목표를 결국 이뤄내는 것도 오늘 내가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가능하다. 1000m를 만들어내기 위해 결국 오늘의 25m를 살아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보다는 오늘 주어진 매일의 삶, 걸음을 조금 더 생생하게 느끼는 게 우리가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이 아닐까. 우선 그 살아있는 움직임을 만드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당장 가 닿아야 할 저 앞의 벽만을 생각하자. 일단 저기까지는 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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