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하루에 한 편 에세이 05
영국은 부활절 방학이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다음주 월요일인 4월 11일부터지만, 9일부터 주말이니 사실상 방학은 금요일 저녁인 오늘 8일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 덕분에 클라네클리의 작은 동네에 살고 있는 나도 방학 계획을 세웠다. 런던에 가기로 한 것이다. 영국에 오기 전에는 영국 내에서 기필코 여러 곳을 여행하리라는 생각이었다. 영국에서 살게 된 인생의 몇 안되는 기회일지 모르니, 반드시 그 이 나라의 모든 것, 특히 나는 문학을 전공하니 이 나라에서 나온 풍부한 문학의 영감들을 다 누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오게 되니 한 곳에 자리를 잘 잡고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아서 여행 생각은 거의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기에 가끔은 홀로 시간을 누리고 싶어서 잠깐 떠나(away)있고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내 나라도 아닌 외국에서 나그네로 발붙이고 살아가는 시점에 또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꾸미고 짐을 챙기고 미지의 가능성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확실히 나도 나이를 먹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겁도 없이 해외에서 혼자 여행하느냐고 신기한 듯 묻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여행하고 싶고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혼자 가는 거지. 뭐가 대단하고 신기할까. 그 땐 ‘여행 잘 하는 유전자’라는 것이 있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그런 유전자가 있다기보다는 그 때는 내가 그것들을 감당할 체력이 있었고, 여행이 주는 설렘 때문에 그것들을 하기 위한 노력, 돈과 시간, 위험 감수 등을 그닥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20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은? 혼자 하는 여행이 설레지 않고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많은 곳을 가고 싶지만 또 굳이 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와, 나 정말 여행에 설레고 울고 웃던 그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절대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그것도 아니구나. 나이가 먹어가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확고하게 가졌던 생각들이 하나둘씩 무너진다. 30대, 40대를 넘어가면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니겠지.
어쩔 수 없다. 인생이 원래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난 앞으로 나이를 먹고 지금보다 더 변하겠지만 또 그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잘 변하지 않는 무언가들도 발견한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이다. 결국 난 런던에 왔다. 여행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절대 놓치려 하지 않는 나. 솔직히 아직도 귀찮고 계획도 하나 없지만 또 ‘그냥’ 온 것이다. 이게 나인 것 같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그냥 가고 본다. 숙소도 가기 전날 밤 겨우 예약하고 어딜 갈지 무엇을 할지 하나도 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런던에 갈까? 하고 고민할 때 나는 한국에서 웨일즈에 갈까?하고 고민하던 나를 떠올렸다. 고민하고 예스를 해서 온 결과가 바로 지금 아닌가. 오지 않았으면 절대 알지 못했을 것들을 알았고 보았고 경험했다. 이곳에 온 지 3주정도 되었는데 나는 이미 한국을 떠날 때의 내가 아니다.
이곳에 와서 무언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을 보고 발견했다는 뜻이 아니다. 갔다는 것 자체가 나를 바꿔 놓는 일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하는 모든 과정에서 나는 익숙함을 벗어버려야 했고 새로운 시간표와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에서 살면서 또 나는 다른 익숙함을 옷 입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전에 입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는다는 것은 몸뚱이로서는 새로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새로움을 옷 입으러 왔다. 이제는 설렘보다 걱정이 더 큰 20대 후반이 되어버렸지만.. 차라리 와서 후회해야겠다 싶은 마음으로 왔다. 도착했더니 웬걸, 많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있다. 숙소에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숙소는 3일 정도 예약을 했지만 홀리데이까지는 1주일 정도의 시간이 있다. 구체적은 계획은 없다. 당장 내일부터 뭘 할지도 잘 모르겠다. 기도하면서 다닐 수밖엔 없다.
그래도 대충 여행의 제목은 정했다.
[현지인처럼 산책하고 박물관에 가서 공부하고 떠오르는 것 아무거나 그때그때 쓰면서 지내기: 런던 편]이다.
그럼 하루에 하나의 에세이 겸 일기로 다시 찾아오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