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힘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특강을 신청에 성공했다. 바로 김영하 작가님의 특강이었다. 어제 제주도에는 종일 비가 오는 날이었음에도 전석매진일 정도로 작가님의 인기는 뜨거웠다.
내가 김영하 작가님을 알게 된 건, 2017년 여름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엄마로 성장하던 시절, 한참 피곤이 누적되어 힘겹고 외로운 시간들과 싸우고 있을 때였다. 아이가 클수록 수유텀이 길어져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긴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어 그 당시에 개봉했던 영화 <콜미 바이 유어네임>을 보러 홍대에 갈 수 있었다. 집을 나서는 나에게 남편은 김영하 작가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소설책을 건네주었다. 가는 동안 지하철에서 읽으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나는 남편의 추천으로 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이후로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을 계속 읽었다. 정말 그저 순수하게 재미있어서 읽었다. 아이를 키우며 어른이 되어갈수록 순수한 즐거움에 무뎌지는 것 같은데 소설은 나에게 그런 순수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공대생이었던 나는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로 에세이나 철학인문서를 읽던 내가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소설에 눈을 뜨게 되었고 소설의 재미를 알려준 건 남편과 김영하 작가님이었다. 순수한 재미는 힘겨운 시간들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은 바로 소설, 이야기가 가진 힘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암울했고 가족에게는 찬란했던 시기였던 2017년, 침대와 벽면 사이에는 소설책들이 쌓여갔고 나는 수유를 하며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책을 드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에서 기다려지는 시간이 수유시간이라니 행복한 엄마였던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소설 읽는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김영하 작가님이 제주도에 오신다는 것만 알고 신청을 했기에 특강의 제목은 행복특강이었다는 걸 자리에 와서 알게 되었다. 행복, 소통, 공감, 이런 주제 식상하지 않냐는 질문을 던지시고는 오늘은 이야기에 대해 말하시겠다고 하셨다.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서. 김영하 작가님의 이야기로 힘든 시간들을 버텨내 온 나였기에 더 기대가 되었다.
*강연을 들으면서 기억에 남는 부분들과 들었던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김영하 작가님의 강의내용이긴 하지만 강의를 들은 저의 이야기이니 편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에서는 왜 몇 만년 전 여러 인류들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fiction(허구)를 믿는 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종족과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좋아하는 종족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야기는 질서가 있고 감정을 건드려서 기억에 오래 남고 이야기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보는 금방 휘발된다. 똑같은 정보를 두 번 말하는 것은 잔소리가 된다. 예를 들었던 이야기는 <빨간 모자>였다. 빨간 모자는 가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서 숲 속에 있는 할머니 집에 가다가 만난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이야기로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어린이들에게 주는 정보가 많이 있다. 무엇이 있을까. 숲 속에 혼자 가면 안 된다, 늑대로 의인화된 낯선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되고 개인정보를 말해서도 안 된다, 진짜 동물인 늑대는 위험하다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런 정보들을 그냥 단편적으로 제공받는 것보다 <빨간 모자>라는 이야기를 통해 제공받아 훨씬 더 오래 기억했기 때문에 위험한 것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에는 고아이야기들이 많다. 겨울왕국도 그렇고 소공녀, 성냥팔이소녀 등 많이 있다. 고아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아이들이 가장 많이 걱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걱정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자기와 비슷한 고민, 자기 이야기에 몰입한다.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통해 온갖 상황에 대비한다.
이야기는 인생연습기계다.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살게 된다. <겨울왕국>을 본 여자아이들이 모두 엘사 왕관을 쓰고 드레스를 입고 가방을 멘다. 이유는 자신이 엘사로 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봄으로써 타인을 마음으로 경험하게 되고 나아가 타인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입장이 다를 수 있는 타인을 적어도 상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이 없는 사람이 아이 때문에 매일 연차를 쓰거나 조퇴를 하는 동료를 이해하고, 반대로 아이가 있는 사람은 아이가 없는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50대 부모가 10대 자녀를 '나도 그 시절 다 지나왔어~' 하며 이해한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과거는 왜곡이고 부모의 10대와 자녀의 10대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하고 있어 상상으로 충분하지 않다.
원래 인간의 본능은 생존을 위해 자기중심적이다. 갓난아기가 '지금 울면 엄마아빠가 피곤하니까 아침 7시에 울어서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해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말이다. 즉각적으로 울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겪어본걸 원초적 공감이라고 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간극은 원초적 공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야기로는 공감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자폐스펙트럼에 대한 강의를 한다면 정말 관심이 있는 스무 명 만 올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로 만들면 수백만 명이 보고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그런 경우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는데, 우리는 가족부터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미쳤다든지, 돌았다든지 하며 단정을 짓는다. 모든 행동의 원인을 단정 짓는 건 이해하고 싶은 욕구 때문인데, 단정 지어선 안된다. 인간은 매우 섬세하고 다양해서 이면에 심리를 다양하게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소설은 인물의 심리를 문장으로 표현한 것인데 타인을 적극적으로 이해할 때 필요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40대 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때 그 친구랑 멀어진 일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10대 때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과거의 자신을 상담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들여다보지 않고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혹하게 억누르고 산다. 그러다 어떤 순간에 폭발하고 만다. 좋은 소설가는 감정을 용감하게 표현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내 감정은 정당해!'라는 해방감을 준다. 문제와 감정들을 겪는 것들을 보여주면서 '나만 이런 일 겪는 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을 준다.
소설가는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쓴다. 이야기를 읽으며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나를, 타인을 입체적으로 보게 된다. "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내 기억에, 마음에, 또렷하게 새겨진 말은,
좋은 소설가는 감정을 용감하게 표현합니다. 독자들에게 '내 감정은 정당해!'라는 해방감을 주죠.
라는 말이다.
이야기에 대한 한 권의 책을 읽은 것과 같은 강연이었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