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보고 싶어서 뛰어왔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 가는 것이라지만 어느 포인트부터는 생성 쪽이 아니라 소멸 쪽으로 흐른다.
우리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가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야 '그런 건 아니었을까' 예측할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엄마가 30대 초반.
엄마는(그 눈부시게 젊은 시절) 결핵 진단을 받고 어린 오빠와 나를 각각 친가와 외가에 맡긴 채, 치료를 위해 요양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부터 엄마는 당신의 시간은 죽음 쪽으로 흐른다 여기며 살았다.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삶을 냉혹하게 대했다.
겨우 전염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결핵 치료를 받고,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몸으로 요양원을 나온 엄마는 다시 혹독한 생활 전선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기댈 곳 없는 부모 형제와 생활력 없는 방랑자 남편을 믿고 어린 자식 둘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 부산은 신발 산업의 메카였다.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지하 공장 아래서 온갖 화학냄새와 고무냄새를 맡으며, 엄마는 신발의 어느 부분을 만들고 있었다.
꽉 막힌 실내에서 온갖 유해한 화학 냄새와 오래된 먼지를 그대로 제 호흡기 안으로 들이 마시며 기계를 돌렸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의 폐와 기관지는 점점 망가져가고 있었다.
이유 없는 돌발성 기침과 호흡곤란.
미혼 시절 즐겼던 등산은 더 이상 꿈꿀 수 없었다. 마음껏 뛰지도 오르지고 못했다.
호흡의 간격은 짧아졌고, 목 안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지독한 기침으로 목구멍에서 피가 나오기도 했다.
완치되지 않는 기관지질환이다.
여러 원인으로 기관지가 좁아져 호흡이 곤란해지고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진다.
가장 견디기 힘든 증상은 발작처럼 일어나는 기침이다.
곧 죽을 사람처럼 기침을 하다가 잦아지기를 반복한다.
결국 폐까지 기능이 저하된다.
환절기에 그 증상이 더욱 심해지다가 어느 날부터는 전혀 예측할 수 없이 시기불문 무턱대고 증상이 발발했다.
갖은 항생제와 스테로이드제로 면역력은 말도 못 하게 약해지고,
감기 걸린 사람과 옷깃만 스쳐도 그대로 옮아와서는 다른 사람보다 3배쯤은 증상이 진폭 되어 나타났다.
그런 몸으로 40년을 견뎠을 뿐만 아니라 온갖 허드렛일, 험한 일, 안 해본 일 없이 다 해가며 혹한 삶을 이어갔다.
갓난아기를 업고 깻잎밭에서 깻잎을 따고, 양아치들이 우글거리는 밤거리에서 노점상을 했으며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호사스러운 남의 집을 쓸고 닦았다.
삶음 젊은 엄마의 몸을 함부로 대했다.
긴 병에 가족들 역시 무던해졌다.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가혹해 보일만큼 무덤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깨문이다.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모든 것이 죽음에 가까워고 있다는 신호였음을 우리는 그 시절 알지 못했다.
또 그렇게, 이 번만 잘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엄마의 유한할 것같은 시간을 의심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두 해전부터 엄마의 증상은 심상치 않았다.
식사량이 줄고, 소화불량이 빈번했다.
특히 설사가 잦아졌다. 그러니 식사량은 더욱 줄어들어 살이 눈이 띄게 빠졌다.
자주 찾아가 보지 못하니, 전화로만 엄마의 증상을 확인해 가며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병원 가봐. 괜히 참지 말고."
병원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외엔 특별히 다른 병명을 찾지는 못했다.
장염. 호흡기질환. 감기 증상의 악화로 인한 폐렴으로 항생제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통원치료를 하며 일상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농장 일을 하는 삼촌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입원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가 필요해서... 와 줄 수 있나?"
2022년.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의 다른 시간이 다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