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귀여운 사람

엄마의 입원

by 꿈꾸는 엄마

급하게 준비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여기는 울산, 한 발만 옮기면 양산.

엄마는 울산에 나는 양산에 거주했다.

엄마는 울산 쪽 병원이 아니라 굳이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 종합병원에서 진료받고 입원하길 원했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명확했다.

차가 없고 아이들까지 케어해야 하는 내가 무리하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곳.

그건 누구의 동의를 따로 구할 것도 없이,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양식 같은 것이었다.

다행히 내가 사는 곳에서 10분 거리에 종합병원이 있었다.

작은 지방 도시 안의 더 작은 이 동네에 유일한 응급의료기관이자 종합병원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내가 '~었다'라는 과거형을 쓰는 이유를 다음에 좀 더 진중한 마음으로 언급해 봐야겠다.)


도착하니 삼촌과 엄마가 순환기 내과 진료실 앞에 넋을 놓고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 피검사와 ct촬영 등,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가 나오면 담당 의사와 간단한 대면 진료 후, 입원이 결정 날 것이다.

"엄마!"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엄마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내 모습을 보는 엄마의 눈에서 확연한 안도감이 감돌았다.

그 걸 알아채는 나도 애잔한 마음에 콧날이 시원해졌다.

오랜만에 엄마를 보는 것인데, 그곳이 하필 병원이다.


아무래도 병원 시스템이란 것에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쇠해진 환자들에겐 더욱 그럴 것이다. 절차에 따라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가며 검사 몇 가지를 하고 나면 혼이 쏙 빠질 것 같다.

엄마 옆에 앉아 엄마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생했네." 하고 한마디 했더니 그것이 마중물 되어 엄마의 하소연이 연이어졌다.

그럴 땐 군말 없이 엄마의 말에 동조해야 한다. 그건 엄마에겐 일상과의 조우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대화를, 따뜻한 커피 한 잔 손에 쥐고 '다 잘 될 거야'라는 마음을 나누었다. 다행이다 내가 옆에 있을 수 있고, 엄마에게 내가 있어서.

그때는 그랬다.



젊은 의사 선생님은 엄마의 폐 사진을 보고 적잖게 놀랬다.

엄마의 진료 기록이 남아있을 텐데도 의사들 사이에선 그것이 공유가 안 되는 것일까.

매번 이런 반응이다. 그러면 우리는 매번 똑같은 역사를 설명해야 했다.

오래전에 결핵을 앓았고, 오랫동안 천식을 앓고 있다는 말을 최선을 다해 설명하다가도, 전혀 관심 없다는 듯한 의사의 표정과 말투에서 전의를 상실한다.

의사는 그저 지금 현재만 중요한 것처럼 질문했고, 엄마는 눈치 없이 장황하게 대답했다.

의사도 이골이 난 듯, 엄마의 설명을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네. (그건 그렇고) 폐사진이 많이 안 좋아요. 소견서를 써줄 테니 다른 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아 보세요."


다 알고 있어요.

다들 그랬어요.

40년 동안 앓아온 천식이랍니다.

나을 수 없는 병이란 걸 알아요.

그냥 평생 안고 살아가야겠지요.

우리가 급한 건, 그게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설사랍니다.


엄마는 이런 내용의 말들을 한 번 더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쯤 되면 결론으로 가야 하므로, 나는 엄마의 설명을 멈춰 세웠다.

"우선은 설사 증상으로 힘들어하시니 그 치료를 먼저 하고 나서 알아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내 말에 의사는 바로 입원 수속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장염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치료가 시작되었다.

코로나 이후, 병원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보호자라도 함부로 입원실을 드나들 수 없었다.

병원마다 규칙은 조금씩 달랐지만, 보호자 1인만 출입증 발급이 가능했다.

또한 보호자는 코로나 검사를 필수적으로 받아야 했다.

별 문제가 없는 경우에만 보호자는 정해진 시간 내에 입원 병동을 드나들 수 있었다.

보호자 1인. 그게 바로 나였다.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내 보호자가 아니다.

언제나 나의 보호자였던 엄마의 보호자가 이젠 내가 되었다.



입원실이 없어 첫날은 2인실에 입원했다.

입원한 사람이 엄마뿐이라 1인실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오히려 좋아,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조용히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엄마는 혼자 있는 것이 무섭다며 입원실 문을 열어 두라고 했고, 간호사들은 코로나로 인해 입원실 문을 닫아 놓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합의 하에 문을 반쯤 열어 두었다.

내일쯤 5인실 병실에 자리가 날 수 있다는 말에 엄마는 간곡히 그곳으로 옮겨 줄 것을 간호사에 부탁했다.

내가 엄마를 잘 못 알고 있었나 보다. 언제나 혼자 편하게 살고 싶다는 엄마의 바람이 진심인 줄만 알았다.

엄마의 반어법과 직설법은 마지막까지 늘 구별하기 힘든 난제였다.


다행히 다음날, 5인실로 옮길 수 있었다.

5인실 병동에는 엄마와 비슷한 연령대의 어르신들이 입원해 계셨다.

5인실로 들어서자 온기가 왈칵 느껴졌다. 사람의 온기가 주는 놀라운 감각에 등골에 열기가 느껴졌다.

엄마도 한시름 놓는 것 같았다.


그렇게 3일쯤 지났나, 생각보다 장염증상이 잘 호전되지 않았다.

엄마는 편하게 누워 쉬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긴 입원실 생활을 무척 지루해했다.

언제나 움직여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만 성에 차는 사람이었다.

눈곱만큼 증상이 호전된 것 같으면 간호사를 붙잡고 퇴원을 종용했다.

간호사들이야 담당의에게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밥을 먹고 나면 다시 시작되는 설사 증상으로 퇴원은 계속 미뤄졌다.

장염으로 한 달 가까이 입원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 나 역시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유를 알고 싶은데, 오전 오후 잠시 회진하는 담당의를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엄마가 전해주는 말에는 엄마의 주관적인 사견이 너무 많이 첨가되어 어디까지가 객관적인 사실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만난 담당의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물질이 체내에서 잘 생성되지 않아 증상이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그에 알맞은 약을 투약 중이니 조금 더 경과를 보자고.

의사 선생님의 잠깐의 설명으로 몇 날 며칠의 염려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놀라운 일이다. 이래서 집 안에 의사 한 명쯤은 있어야 하나 맥락 없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기간이 길어지면서 덤으로 얻는 것도 있었다. 어쩜 그건 덤이 아니라 메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한 번 면회를 오는 나를 기다리는 엄마의 긴 목이 사랑스러웠다.

병실로 들어서는 나에게서 마치 후광이 비치듯, 엄마는 내 얼굴을 발견하면 금방 화색이 돌았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단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엄마는 생각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구나.

엄마 옆에 앉아, 엄마가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고 밥 시중을 드는 나를 엄마는 조금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도, 이내 같은 병실에 입원 중인 다른 환자분의 시중까지 나에게 한 번씩 들게 했다.

그건 일종의 자기 과시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에 기꺼이 그렇게 했다.

"내 딸이에요."

같은 병실 환자에게 내 소개를 하며, 과일이나 음료수를 가져다주라고 내게 주문했다.

나는 세상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한껏 착한 자녀 연기를 했다. 그것도 나쁠 것 없었다.

평소엔 천하 무심한 자식이니, 이럴 때라도 변변치 않은 자식 한 번 마음껏 써먹으라고.

엄마는 세상 천하 독단적인 사람이면서도 굉장히 남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이중적인 엄마의 모습이 내 나이쯤 되고 다시 보니, 참 사랑스러워서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이런 이야기를 오빠나 남편에게 하면, 역시 피식피식 같이 웃는다.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만 알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감이다.


나의 엄마는 꽤나 모순적이고 귀여운 사람이었다.

이런 기억이 나에게 너무 간절할 것이란 걸 결코 그날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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