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무로 태어나.
하고 막둥이가 누워있는 내게 느닷없이 물었다.
최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으로 아이에게 심리적인 파장이 왔나 염려되었다.
'죽으면 그냥 사라지는 거야.' 평소 내가 가지고 있는 소신대로 말하려다, 아무래도 아이에게 할 말은 아니다 싶어 "글쎄..." 하고 말을 흐렸다.
아이는 내 대답이 궁금하기보단, 자기가 하고 싶은 대답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상밖의 대답이라 나는 살짝 당황했다. '올빼미'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올빼미는 늦게 늦게 자도 되고, 아침에 학교도 안 가도 되니깐."
막둥이가 올빼미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너무나 명확해 웃고 말았다.
"엄마는?"
아이가 재차 물었지만, 아무리 쥐어짜도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뭔가 감동적이고 교육적이어야 할 것 같은데.
아이의 가벼운 질문에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나 싶어, 아무 대답이나 하고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엄마는 나무로 태어나!"
"나무? 왜?"
"내가 올빼미가 돼서, 날아가서, 엄마한테 가서, 앉아서 쉴게."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쩌면 좋나.
"그래, 그래. 그러면 되겠나. 엄마 나무로 태어날게."
"응"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제 할 짓을 하며 놀았다.
내 마음 한쪽이 뻐근해져 온다.
다시 태어나면 나무로 태어나겠다는, 너무 클리셰 해서 의미도 모호한 그 말이 순식간에 새롭게 느껴진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건, 바다로 흘러 다시 구름이 되어 흙으로 흘러가건 아무튼 나무의 영양분이 될 것이니 사람이 나무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딱 내 아이가 살아갈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
'얘들아 엄마가 여기 있다.'
'우리 엄마가 여기 있네.'
하며, 적어도 우리끼리는 알아볼 수 있을 동안만.
엄마의 유골을 흙을 조금 파서 그 안에 그대로 묻는 잔디장으로 치렀다.
지금쯤 엄마도 어느 나무의 뿌리쯤에 고여있을까.
아, 수목장을 할 것을 후회가 된다. 그럼 좀 더 빨리 나무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사는 동안도 그렇더니, 죽고 나서도 엄마 너무 고생만 시키는 못돼 먹은 딸이다.
세상의 모든 나무가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누구를 지키려 저렇게 울창하게 자랄까.
누구를 지키다 저렇게 밑동만 남았나.
내가 앉은 이 식탁도, 이 종이도, 이 연필도, 이 그릇도... 누구를 지키려다 이렇게 다르게 머무르고 있나.
생명이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후, 생각하니 좀 섬뜩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