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없는 건 좀 무서워

서사의 힘.

by 꿈꾸는 엄마

아이들이 요즘 다시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첫째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막둥이까지 너무 많이 돌려봐서 이제는 대사까지 외울 지경이다.


주인공 아이들이 꼬마 도깨비와 힘을 모아 귀신을 물리쳐 나가는 내용으로 여자 주인공 '하리'에게는 귀신들이 구천을 떠돌아 악귀가 될 수밖에 없는 (살아생전) 사연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옆에 앉아 같이 보다 보면 나도 한 번씩 섬뜩하고, 때로는 가엽고 안타까운 구구절절한 사연들이다.

어느 정도 시사적인 면도 있어 마냥 시시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제는 주인공 '하리'의 돌아가신 외할머니 영혼이 악귀에 씐 하리의 엄마를 구하기 위해 내려와 활약을 펼치는 에피소드가 나왔는데,

"이 할미는 하늘에서도 쭉 지켜봤단다. 네 엄마가 밥은 잘 먹는지 잠을 잘 자는지..."

라는 외할머니 귀신의 대사에 하마터면 목 놓아 울 뻔했지 뭐람.

아직은 한 번씩 속수무책으로 눈물 꼭지가 돌아 조절이 안될 때가 있다.

아주 기를 쓰고 꼭지를 잡아 돌려 겨우 잠글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나오는 귀신마다 그 사정이 여간 딱한 것이 아니다. 하나 같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연들이다.

엄마를 기다리다 죽은 아이 귀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죽은 엄마 귀신,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아내 귀신,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탈출하기 못해 원한을 품은 귀신...

악귀가 되어, 산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이 마냥 무섭지만은 않은 것은 그런 가여운 사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간혹 정말 맥락 없고 사정없이 지독한 악귀가 인간들을 무참히 잡아가는 내용이 한 번씩 나오는데, 아이들은 그런 귀신들이 유독 무섭다고 했다.


"사연이 없는 건 좀 무서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

그 사정을 내가 공감하는 순간 그렇게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죽기 직전까지 맞고 살면서도 꾸역꾸역 참고 살았던 이유는 어린 자식들 때문이었지만, 그런 어린 자식까지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할 수 없다고 머리 깨지게 깨닫는 순간, 손에 쥔 둔기를 무작정 내리 쳐 남편이란 자를 죽이고 만, 한 여자의 사연.

평생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그것이 부모의 보편적 행동이 아니란 걸 깨닫고 허술한 계획 하에 의붓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한 젊은 청년의 사연.

노인 치매 간병을 오랫동안 홀로 감당해 온 또 다른 노인이, 자신의 불치병으로 더 이상 간병을 할 수 없어지면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치매 걸린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려던 사연.


그들의 사정은 비열한 변명과는 전혀 다른 비통하지만 진실된 스토리가 있다.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면 두려움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느껴질 것이다.

그에 반해 사연을 가장한 비열한 변명들에는 간사하고 교활함이 있다.

그래서 더욱 섬뜩하고 잔혹하게 느껴진다.

다행히 영혼 없고 맥락 없는 그들의 노림수에는 본능적으로 마음이 가닿지 않는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진정한 사연들에게 속수무책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런 이들은 자신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이 더욱 눈물짓게 한다.

그들이 없는 빈자리를 채워주는 미미한 구휼人 이 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5천 명이 죽었다면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라고 기타노 다케시가 말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다.

그들의 사연들 역시 하나로 뭉쳐 퉁칠 수 없는 개별적인 것들이다.

2014년 4월 16일 304가지의 사연들이 수심 깊이 가라앉았다.

2022년 10월 29일 159가지의 사연들이 압사되었다.

2024년 12월 29일 179가지의 사연들이 연소되었다.

...

그리고 우리는 그런 하나하나의 사연들에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사연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남의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공감이라 한다.


진정한 사연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제일 먼저 잔학무도하다.

철저히 남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런 자들은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길 바랄 뿐이다.


공감의 부재가 얼마나 삶을 허무하게 만드는 지도 안다.

세상 혼자 인 것 같다가 결국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세상에 저주를 퍼부어 버리고 나조차 사라지고 싶어질 수도 있다.

아프고 쓸쓸한 사연을 헤어릴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그들이 조금 더 수다쟁이면 좋을 텐데.

미리 헤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애당초 비통한 사연이 죄인의 명분이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언제나 각성하며 살고 싶다.

내 아이들이 그런 사람으로 자랄 수 있길 역시 고대한다.

공감하고,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사연들을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 세상에 내놓고 싶다.

그래서 아이들이 애니메이션 속의 귀신들을 보고 울고 있는 모습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곁에서 함께 보고 울고 있는 내가 마냥 부끄럽지만은 않은 것이다.


공감력마저 타고난 재능으로 단정 지어 버리면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야 할까.

타인의 고통을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로, 타인의 행복을 노력 없는 행운으로 몰아세우며, 그들의 서사를 전혀 고려하지고 공감하지 못하는 작금의 잔혹성에 대해 어떻게 설득해할까.


내 그릇으로는 더 세련되고 교육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겠어서, 콩순이를 보고 울고 있는 막둥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으로. 친구가 같이 놀아주지 않아 속상하다는 막둥이를 언니들이 돌아가며 안아주고 있는 모습에 감동하는 것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친구를 험담하는 아이에게 혹시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넌지시 말해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읽고, 쓰고, 들려주고, 나누는 것의 힘으로 작게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누구나 한 번쯤은 용서받을 수 있는 사연이 있을 수 있으니깐.

누구에게 오랫동안 기억 될 만한 사연을 하나쯤은 남기고 싶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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