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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grace Apr 07. 2024

8화. 나만 듣고 싶어.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1부 8화

희성의 제안을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당장 사귀자는 것도 아닌데 냉정하게 거절하고 돌아서는 것이 왠지 매몰차게 느껴졌다.

"매일 만나야 되는 거야?" 내가 물었다.

"아니!.... 이틀에 한 번?" 희성은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냉큼 대답했다.


사람을 알아가는데 한 달이란 시간이 충분한지 알 순 없지만 희성이를 한 달 동안 만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은 것은, 그의 확신과 선선함이 마음에 들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틀 뒤 다시 희성이를 카페에서 만났다.

희성이는 어눌한 말투와 달리 늘 명확하게 자신의 마음을 나에게 표현했다.

지하철 안에서 처음 나를 만난 날. 학교 앞 국밥 집에서 나를 만난 날. 졸업반 선배들이 마련한 주점에서 나를 만난 날들을 이야기하며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미소와 말투와 행동을 사랑스럽게 바라봐주고 있었다.

어느 지점에선 얼굴이 붉어지다가 어떤 부분에선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 치는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희성이의 표정에서 희성이가 나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오랜만에 희주를 만나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는 희주에게 희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희주는 예상대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희주는 벌써부터 희성을 언제 소개해줄 거냐 닦달하기 시작했다.

당장 소개할 만한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고 나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희주는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나를 타박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 뭘 그렇게까지 신중하냐고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사업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망설여?"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깐"

"만나봐야 어떤 사람인지 알지. 만나봤더니 마음에 안 맞아 헤어지는 거. 그게 연애야."


맞는지 맞춰보는 것이 연애인지 맞지 않아도 맞춰가는 것이 연애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잠깐만" 희주가 자신의 연애론을 이야기하다 잠시 핸드폰 문자를 확인했다.

"우재오빠. 우리 학교 근처 지나가는 길이라는데 시간 되면 커피 한잔 하자는데. 여기로 오라고 해?"

희주가 답장을 보내면서 나에게 물었다.

"뭐, 난 상관없어"


10분이 조금 지났을까 우재 오빠가 카페로 들어왔다.


오빠가 자리에 앉고 희주는 본격적으로 나와 희성이의 이야기를 도마 위로 올려놓았다.

오빠가 희주의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대단한 판결을 내려는 사람처럼 

"믿을 만한 사람이야?"라고 물었다.

마음에 들면 당장 사귀는 거지, 한 달 동안 알아가자는 것이 너무 얍삽하지 않냐며 미심쩍은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설이가 오죽 탐탁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으면 그 사람이 그런 방책을 내놓을까. 안 봐도 난 눈에 훤한데."

무섭도록 정확한 희주의 말에 괜히 머쓱해졌다.

대화가 너무 나에게 치우는 것이 부담스러워 나는 얼른 다른 화제로 옮겨가길 바랐다.

그 마음을 우재 오빠가 알아라도 차린 듯 희주와 나에게 오늘 수업 마치고 다른 약속이 있는지 물었다.


"저녁에 빈스 밴드 녹음실 갈 건데 같이 갈래? 이번에 녹음실 옮겼거든. 나 혼자 가는 것보다 너희가 같이 가면 엄청 반가워할 것 같은데."


희주는 역시 흥분하며 있는 약속을 깨서라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 역시 희주의 마음과 다를 바 없었지만

괜히 진정해 놓은 마음이 다시 어수선해질까 겁이 나기도 했다.

"설아, 같이 갈 거지?" 희주가 애원하듯 내 팔에 기대어 뜸 들이는 나를 설득했다.

나는 또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우재 오빠도 만족한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녹음실은 오르막 길을 올라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고즈넉한 골목들 사이에 있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진주색 외관 4층 건물. 1층 주차장 옆으로 난 노출된 계단을 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2층. 그가 있는 녹음실이었다.

계단 담벼락엔 덩굴이 드리워서 제법 운치 있는 건물이었다.


우재 오빠는 커피를 희주는 베이글을 나는 계절 꽃들이 다양하게 섞인 꽃다발을 준비해서 녹음실 문은 두드렸다. 괜히 머리 한번 쓸어 넘기며 떨리는 마음을 달래고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녹음실 안으로 들어가자 건욱이 제일 먼저 "형님" 하며 우재 오빠를 반기다, 희주와 나를 보고 낮은 함성을 지르며 더욱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내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든 건욱이 "영광입니다."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승재씨와  건록씨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녹음실로 들어선 순간부터 쉬지 않고 눈동자를 움직여 그의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를 애타게 찾으면서도 그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아하지 않는 내 마음에 지쳐갈 때쯤에 그가 안 쪽에 작게 딸린 작은 방에서 말간 얼굴로 나왔다.

공연장에 보던 모습과 달리 편안한 차림의 그의 모습이 간명하게 내 가슴에 박혀 진동했다.

우리를 보고 살짝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머릿결을 쓸어 올리는 그의 모습이 수채화처럼 그윽했다.

내 얼굴이 금세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애써 담담한 척 보이려 애를 쓰며, 지연 언니가 안내하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건욱 씨의 여자친구인 지연 언니가 우리가 준비한 커피와 베이글을 잘 담아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내가 가져온 꽃을 팬트 병으로 급하게 만든 꽃병에 담으며 지연 언니가 너무 이쁘다며 반짝이는 눈을 하고 말했다.


"내가 꽃 사다 주면 먹지도 못하는 거 사 왔다고 혼내면서 남이 사다 준 꽃을 보면 저렇게 좋아하는 거. 여자들의 어떤 심리인 거예요?"

건욱 씨가 나와 희주를 보며 장난 반 진담 반 물었다.

"네가 사 오는 꽃은 죄다 국화, 카네이션. 조문하냐. 내가 네 어버이야?" 지연이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건욱 씨와 지연 언니의 밉지 않은 다툼이 사랑스러워 나와 희주가 눈을 마주치며 소리 낮춰 웃었다.


"희주 씨랑 설이 씨 오늘 정말 잘 오셨어요. 이번에 우리 새 앨범 나오거든요. 작업한 거 한 번 들어보고 감상평 한 마디씩 부탁드려요."


새 앨범에 담길 두 곡 모두 도해빈, 그가 직접 작곡 작사한 곡이라고 다시 건욱 씨가 설명해 주었다.

어쿠스틱 하게 편곡한 곡과 보사노바 풍의 다른 곡을 연달아 들으며 나는 몇 번씩 짜릿하게 밀려오는 감동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담백하게 가사를 읊듯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내 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으로 들어와 묘한 긴장감과 질투심 설렘이 뒤섞여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치기 어린 감정이 들키기 전에 희주가 두 손을 얼굴 위까지 올려 박수를 치며 감동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 그의 곡에 대한 평을 이야기 나누는 동안 나는 나의 상태를 진정시키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 말도 없이 상기된 채 앉아있는 모습이 자칫 마음에 차지 않는 것으로 비칠까 염려가 되어 애써 마음을 추슬러 보려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빈 빨대 소리에 그가 시선이 나에게 옮겨왔다.


"설이 씨는 어땠어요?"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 저는 저는 너무 좋아서..."


"설이 씨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오히려 저희에겐 그게 필요하니깐." 

건욱 씨의 말에 더욱 진지한 얼굴로 나의 표정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 목이 탈 것 같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나만 듣고 싶어요." 

그가 나의 말 뜻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움찔거렸다.

"혼자, 조용히,  나만 듣고 싶어요... 그러니깐 제 말 뜻은..."

쉼표를 무수히 찍으며 하는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얼굴이 화르륵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좋아요!"

목 뒤덜미로 식은땀이 맺혔다.


나의 모든 촉수가 예민하게 곧 두서는 이 느낌이 낯설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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