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1부 7화
오랜만에 느껴보는 숙취였다.
어젯밤 일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어리광 같은 거라고.
10대 소녀가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보며 열광한 나머지 가상의 세상을 만들어 길을 잃듯, 나 역시 그의 음악과 '도해빈'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혼돈하여 공간적 감각에 착각이 일어난 에피소드 정도로.
딱 그 정도로 정리하고 앞으로 그를 그의 음악으로만 생각하자.
하필이면 그날따라 이른 아침부터 전공수업이 있어 쓰린 속을 붙잡고,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대신 스스로에게 강론을 펼치며 시간을 날렸다.
"이 설!"
초등학교 어학원 동기이자 한국대 동기 지웅이가 공대건물 앞에 서서 나를 불렀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
기운 빠진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같이 밥 먹자" 지웅이 다짜고짜 말했다.
스스럼없는 사이긴 했지만 단 둘이 밥을 먹어 본 적은 없어 살짝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왜" 하고 내가 물었다.
"그냥" 지웅이 대답했다.
"싫어"
"왜"
"초딩 입맛. 나는 지금 어른의 맛이 필요해"
지웅이 편식이 심하고 어린아이 입맛이라고 하소연하시던 지웅이 어머님의 말씀이 떠 올랐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거 무조건 먹을게"
"뭐야?"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뭐가?"
"나한테 뭐 잘 못했지?"
"아닌데. 아, 그래서 뭐 먹을래?"
".... 마라탕?"
나는 지웅이와 말씨름을 할 기운이 없었다.
정말 나는 지웅이와 나란히 학교 앞 마라탕 집 앞에 앉아있었다.
"너랑 단 둘이 앉아서 마라탕. 킹 받는다."
"단 둘이 아냐"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지웅이가 말했다.
"뭔 말이야?"
지웅이가 내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마라탕 가게의 문이 열리고 지웅이가 그쪽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훤칠한 남자가 강아지처럼 더벅머리를 위아래를 움직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움찔해져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강희성" 지웅이 내게 말했다.
"뭐?"
"우리 학교 치의대 3학년 강희성"
"근데?"
"늦은 거 아니지?"
희성이가 밖의 차가운 공기를 몰고 와 해맑고 웃으며 내 앞에 앉았다.
내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뭐야, 하며 지웅에게 따져 물었다.
"아니, 이 새끼가 며칠을 귀찮게 하잖아. 너 소개해달라고"
희성은 여전히 나를 보고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널 보고 첫눈에 반했다나 뭐라나, 미친 새끼"
지웅이 비웃듯 말했다.
내가 매섭게 째려보니 움찔한 지웅이 급하게 일어났다.
"나는 이제 간다."
"무슨 소리야?!" 내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 약속 있어. 돈가스 먹으러 가야 해"
나는 태연하게 말하는 지웅이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
"미친..." 이를 앙 물고 씹어 먹듯 말했다.
지웅은 희성의 어깨를 두 번 정도 툭툭치고 정말 가게를 나가버렸다.
나에게 엄지를 척 내밀며 나가는 지웅이의 모습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났다.
"미안해. 내가 지웅이를 많이 귀찮게 했어."
나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차분히 희성에게 물었다.
"날 어떻게 알고..."
"봉사활동. 올봄에 애육원 단체 봉사 활동 때 만났는데...."
나는 시간을 거슬러 기억을 더듬어보려 애썼지만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희성이와 둘이 어색하게 마주 앉아 마라탕을 먹었다.
남은 건더기가 없나 숟가락으로 몇 번 휘휘 젓다가 말고 내가 희성이에게 물었다.
"날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내 말이 다소 공격적으로 들릴 것 같아 걱정되었지만 희성이는 개의치 않고 한결같이 선선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면 대답했다.
"사람 소개해 달라는데 이유가 달리 뭐 있겠어. 알아가고 싶은 거지, 널."
"사귀자는 거야?"' 뜸 들이지도 빙빙 돌리지도 않고 내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희성이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뭐 바로 사귀자는 건 아니고. 아니, 나는 그러면야 좋지만..."
"그런 거면 정말 미안한데. 난 아직..."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성이 서둘러 내 말을 낚아채며,
"한 달만. 딱 한 달만 만나자"라고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한 달만? 한 달 뒤엔?"
"한 달 뒤에도 내가 정말 아닌 것 같으면 그땐 더 이상 널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야."
이제껏 내게 관심을 보이면 접근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몇 달을 쫓아다니며 호감을 보였던 학생회 오빠와 잠깐 사귄 적이 있다.
그리고 막 대학 들어와 소개팅 같은 미팅에서 만난 다른 학교 미대생과 반년 정도 만난 적도 있다.
대부분 내게 보인 호감에 대한 답례 정도의 가벼운 관계라 연애라고 하기도 무색했다.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나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썩 탐탁지가 않았다.
"한 달 동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뭔데?"
"그냥 넓은 마음으로 날 살펴봐주는 거. 내가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고 봤더니 내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장담해?"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널 보고 있었거든."
희성의 확신에 찬 대답에 더 이상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쇄기를 박듯 다시 한번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넌, 내게 어울리는 사람이야.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