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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는 사람 K Jul 19. 2024

사소한 당부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다산책방.

 출근길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면서 어쩌면 아빠도 이 길을 걸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다. 동창 모임으로 나간 대학로를 지나다가 아빠는 이곳을 어떤 마음으로 다니셨을까 상상다. 이렇게 길을 걷다가, 특정 장소를 지나다가, 타인에게 익숙한 향수 향이 느껴질 때, 수시로 아빠를 소환한다. 아빠가 떠나신 지 일 년 하고 두 달이 지났다.


 확신했던 시간이었다. 모두 가망 없다고 판단했고 나는 그들의 판단을 의심했다. 수술 후 회복을 꿈꾸며, 일상 복귀를 낙관했다. 모두 말을 아끼고 있을 때 아버지는 틈만 나면 말씀하셨다. "인생 너무 짧은데, 젊음은 얼마나 순식간겠니. 사는 거 별거 없어. 그저 재미있게 살아."

 

 일이 전부인 줄 알았던 때였다. 그것만이 나를 증명한다는 듯 방향도 보지 않고 내달다. 숙제 못한 학생 같은 마음이라 쉼조차 부담되곤 했다. 일이 내가 아니고, 나도 일이 아닌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노력만큼 결과가 주어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노동력이 알량한 월급으로 환산되 '다 이렇게 사는 거려니'했다.    


늘 그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열심히 일하다 보면 저절로 어른이 되 줄 알았다. 떳떳하, 자존심 지키며 살 수 있을 줄 알았. 이상과 현실, 욕망과 만족, 생각과 행동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졌지만, 그 틈이 벌어질수록 일에 몰두했다. 과대평가된 내 허상 뒤에 적당히 몸을 숨겼다. 자주 외면하고, 종종 자책했다.       

     

"사는 거 별거 없는데 함부로 기죽지 말라"라고 셨지만 나는 여전히 쉽게 위축된다. "사소함이 쌓여서 인생이 되는 거"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사소한 행동이 나를 설명해 준다는 의미였을 거라서, 나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했던 사소한 경험을 떠올릴 때면 서글픔이 몰려와 자꾸만 움츠러든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수를 향한 혐오, 곤경에 처한 약자 앞에서 내가 보인 태도는 기껏해야 허공에 대고 분노하는 것뿐이었다. 가장 먼저 절망하고 빠르게 합리화하고 서둘러 외면한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나아지고 있을지 모른다며 비루한 희망을 품는다. "당당해라" 아버지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당부하셨다.


 방향 없이 달리던 속도를 늦추고서야, 당당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처럼 사소한 것들] 펄롱 고민, 갈등, 괴로움이 그리고 사소하지 않은 용기와 행동이 무척 인상 깊은 여름밤이다. 오늘은 7월 19일, 경북 예천에서 해병대 채상병이 목숨을 잃은 지 1년 되는 날이다. 그의 죽음과 부당 지시, 수사 외압에 관한 조사는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다.     


펄롱은 억지로 자동차 키에 손을 뻗어 시동을 걸었다.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ㅡ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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