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작별인사. 김영하. 복복 서가. 2022.

by 묻는 사람 K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끝맺는 이성복 시인의 <그날>(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 지성사. 1980)이 자주 생각난다. 적응했다고, 아니 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참담하고 기괴한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니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최근 임명된 방통위 위원장은 법인카드의 사적 유용, 업무용 차량을 이용해 대학원을 통학한 문제, 1회 200만 원이라는 엄청난 양의 주유비 결제,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문제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다. 현재 직무 정지 상태라고는 하지만, 공직자로서의 신뢰성 문제를 도무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노동계와 정치권 우려에도 불구하고 노동 장관으로 지명된 극우 성향의 김문수는 "노조가 없다는 이유로 감동받았다"는 발언과 노란 봉투법 반대등으로 논란이 많았다. 그리고 현 정부의 친일 외교력으로 일본의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뉴스가 잠깐 다뤄졌다. 그뿐인가 대통령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3000여 명의 대규모 통신을 사찰했다는 뉴스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뉴라이트 김형석 대한민국 역사와 미래 이사장이 독립 기념관 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친일파의 명예 회복을 첫 임무로 내세웠다. 24년 8월 12일 오후 3시를 기준으로 올해는 '독립기념관에서 개관 37년 만에 처음으로 광복절 경축식을 하지 않겠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영부인의 300만 원 명품 가방이 뇌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 국민의 웃음거리가 된 국가 권위 위원회에서 명품백 담당을 했던 국장은 '양심에 반하는 일 괴롭다'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미성년 자녀를 둔 50대 가장이었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난장판에도 아랑곳 않고 휴가를 떠난 대통령은 보란 듯이 해병대 옷을 입고 환히 웃으며 사진을 남겼다. 검사들의 휴대폰조차 폭발 위험이 있어 압수한 채 "황제 조사"를 받았던 영부인은 비공계 행보를 공개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부산 깡통 시장 상인을 만난 사진을 올렸다.


나는 온갖 신음 소리를 무시한 채, 귀를 막고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를 읽었다. "무료하고 갑갑하다고만 여겼던 평온한 시간들은 실은 큰 축복이었"다는 문장에 줄을 긋고, "그들과 나 사이에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자책하며 문장을 형광펜으로 칠했다. 저자의 책이 인간 도리와 윤리를 강조하는 소설로만 읽히지 않기를 바라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니 자꾸만 그리로 마음이 휘였다.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나는 행운을 누렸다면 마땅히 윤리도 갖춰야 해."



<작별인사>에 대해 더러는 김영하 작가 답지 않아서, 전작과 달리 기시감을 주어서, 인물의 입을 빌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약간의 실망감을 표하는 독자도 있지만, 나는 AI를 다룬 책과 영화뿐 아니라 김영하 소설 중 단연 최고라 생각한다.


읽으면서 한 두 방울씩 쌓여가던 슬픔이 책을 덮자 넘쳐흘렀다.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보다, 조금씩 차올라 넘쳐흐르는 슬픔은 오래가는 법인데 이 기분이 얼마나 계속되려나 조금 두렵다..... "누구도 허망하게 죽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도 헛되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한다." 일면식 없는 분이지만, 그의 고통과 죽음이 허망하지 않기를 온마음으로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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