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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그 순간

모순. 양귀자 장편소설. 도서출판 쓰다. 1998년.

by 묻는 사람 K

독서 모임이 10년을 넘기다 보니 가장 어렸던 20대 L도 30대 중반을 살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모두 앞자리가 바뀌었다. 그 사이 몇몇이 가정을 꾸렸고, 누군가는 길고 짧은 연애를 번갈아 했으며, 또 다른 이는 인연을 찾기 위한 만남을 종종 한다고 말했다. 물론 연애나 결혼과는 무관하게 사는 친구도 있다.


상황이 어떠하든 그날의 공통 관심사는 '결혼할 상대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느냐'였다. 영화에서 처럼 후광이 비춘다거나, 종소리가 울린다든가, 전기가 찌릿하고 흐르는 걸까? 저마다 자신의 경험을 과장과 왜곡을 섞어 나누었다. 사랑 결혼으로만 완성되는 게 아니라 믿는 나는, 인연에 지나친 낭만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편이다.


이 또한 시절연 아닐까 싶다. 하필 그때 그 순간! 상대가 있었고, 또 하필 그 순간! 양쪽 모두 결혼 의지가 있었으며, 심지어 상대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결혼에 도달하는 거라고. 누군가는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환상을 깬다고, 진정한 사랑을 몰라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은 그렇다.


스물다섯 해를 살아가는 안진진 시점에서 쓰인 <모순>은 98년 출판된 장편 소설이다. 밀도 있고 섬세한 문체는 물론 심리묘사, 고독과 사랑, 내적 갈등이 잘 표현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은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는 게 아니겠나. 이런 인연은 작가도 그러하겠지만, 독자도 과감하다.


이십 대 후반 독자였던 나는, 안진진이 사랑하는 김장우가 아닌 나영규를 택한 것에 배신감을 느꼈더랬다. 쉽게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나였지만, "마음속으로 열두 번도 더 안진진 괜찮아?라고 묻고 있을 이 남자를 통해 나는 앞으로 사랑을 배울 것이었다. 때로 추하고 때로는 서글프며 또한 가끔씩은 아름답기도 할 사랑을....(199쪽)"이라 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스물 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나,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 보내고 있는 나. (17쪽)"라는 점에서 안진진은 또 다른 나였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 다행히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188쪽)"라고 당찬 냉소를 뱉을 수 있는 건 달랐지만....


소설로 만난 안진진 삶 속에 수시로 들락 거렸다. 어느 순간 각자 삶으로 돌아갔고 25년 만에 다시 만났다. 잊고 살던 대학 동기를 만나는 마음이었다. 그녀도 중년에 이르렀을 시간, 행복한지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엄마처럼 "불행의 과장법"으로 삶에 맞선다고 할까? 이모처럼 "무덤 속 같은 평온"을 산다 하려나? 아님 "함부로 정의될 수 없는" 아버지를 닮아있을까?


중년이 되어서야 그때 안진진의 선택을 이해한다. 안정감과 결핍을 저울질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솔직할 수 없다면,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하거나 심지어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결혼이 대단히 숭고하고 신성해서라기보다 일상의 연장이니까. 너절함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관계라는 면에서 그렇다.


솔직해질 수밖에 없는 시간은 온다. 선택의 이유가 귀찮음이 될 때도 많아진다. 생각만으로 가슴 뛰고 숨 막히는 감정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사랑의 유효기간 3년, 마음이 변하네 아니네 하지만, 사랑의 형태는 변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변형을 수용하는 것,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게 아니겠나 싶다.


"무더운 여름엔 세상과 우호적이 될 수 없다고 그래서 여름엔 숨도 크게 쉬지 않고 계절이 빨리 지나기만을 바란"고 그녀는 말했다. 나 또한 이 폭염이 빨리 지나가길 바란다. 더위가 누그러지면 아수라장인 24년 대한민국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거라 기대한다. 시간이 흘러 노년에 안진진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 무엇을 말하려나. 부디 그때까지, <모순>이 살아있기를 고대한다.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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