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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이라는 달콤한 거짓말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 정희원. 한빛라이프. 2023.

by 묻는 사람 K

100세 시대라는 말을 하도 자주 듣다 보니, 노년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해가 바뀌는 시점에만 낯설고 벅차게 나이를 인식했을 뿐 금방 잊혔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조급함을 청춘의 신호라고 착각했다. 신기루 같은 먼 훗날! 별다른 노력 없어도 당연히 올 거라는 증거 없는 확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걸 모를 리 없지만 정작 내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것은 물론, 귀찮고 번거로운 일도, 심지어 당장 처리할 수 일조차 미래의 내게 번번이 미루곤 했다.

근 25년 동안 직업 환경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 안정감으로 생각했던 변함없음이 가끔 불안을 자극하는 요인이 된 것 같다. 타 직군에 비해 정년이 탄력적인 업종이라는 이유로 현재의 밥벌이가 계속 유지될 거라고 판단했다. 관계를 확장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만나는 사람도 대체로 변화가 없다. 늦은 결혼은 삶의 패턴을 흔들지 않았고, 무자녀라서 아이 성장에 따른 변화 또한 체감할 기회가 없었다. 바꿔 말하면, 생애 전환기에 대한 고려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TV 방송뿐 아니라, 유튜브, 포털 사이트, SNS에서는 동안 비결, 늙지 않는 건강 유지 방법, 젊어지는 식단,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패션 팁 등 정보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마치 노화가 피해야 할 바이러스이고, 퇴치해야 하는 질병이라는 듯 호들갑스럽다. 외모가 경쟁력이었을 때도 없었지만 노화를 몸으로 맞닥뜨릴 때는 서글퍼졌다. 눈밑 주름이 생기고, 새치가 현저하게 늘고, "아줌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 돌리면서도 내 나이를 잊고 살았다.


P선생님은 최근 인생 3막을 시작했다고 말씀하셨다. 몇 해 전 환갑 여행을 다녀오셨다는 말이 떠올라 대략 연세만 짐작할 뿐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여쭤보니, 평균 기대 수명을 90으로 전제하고, 30세까지는 성장과 공부를, 60세까지는 일과 직업 성취를, 나머지 30년은 잘 놀고, 잘 먹고, 잘 살다, 잘 죽는 것에 집중하는 거라고 하셨다. P선생님답다는 생각과 함께,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P선생님에게는 적합한 구분이지만 개인 상황에 따라서 65세 이후가 3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쳇 GPT에게 '대한민국 기대 수명을 알려달라'라고 했더니 약 83.3세, 남성은 80.3세 여성은 86.2세라고 했다. 물론 기대 수명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기 때문에 P선생님 말씀처럼 90세로 잡아도 무방할 터이다. 책에서 생애 주기를 질리도록 보았다. 심지어 이와 관련한 강의도 했건만, 정작 내 삶을 점검하고 적용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바보 같다고 반성하면서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디쯤 있을까?' 계산해 보았다.


"아! 어느새!......"


평소 같은 하루였다면 그리고 정희연 교수의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선뜻 고르지 않을 제목이었지만,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읽던 책을 미뤄두고 책장을 넘겼다. 저자는 "노년기를 건강하고 역동적인 기간, 꾸준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완성의 시기로 재편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언과 전략을 제공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했다. 무턱대고 젊음을 칭송하보다 (개인차를 고려한) 연령 수준 맞는 근력 운동, 식습관 개선, 회복 수면 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어설프게 아는 것은, 아예 모르는 것보다 위험하다. 회피할수록 불안이 자극된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다. 마치 그러면 세월이 비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은 평균 수명 연장이라는 비장한 목표가 아닌 '체중, 혈압, 혈당' 같은 파라미터를 관리해서 내재 역량을 관리하는 실용적인 면에 주안점을 두었다. 노화란 "몸에 고장이 쌓이고, 그 결과 사람이라는 시스템이 굴러가는데 변화가 생기는 것"이라 했으며, "60-80세쯤 되면 내가 가진 병의 목록은 살아온 삶의 결과"라고 했다. 무섭도록 정확한 말이다.


인생 2막!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것,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 필요한 줄 알고 의미 없이 붙잡고 있던 일을 추려 보았다. 한때 소중했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옷처럼, 생애 전환기에도 과감한 정리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사는 동안'으로 미뤘던 프리모레비의 묘지, 남편이 가고 싶다던 프로방스, 고흐가 황금기를 보낸 아를 여행을 10년 계획 안에 넣었다. 무엇보다 엄마와의 여행을 우선순위로 옮겨두었다. '나중'으로 미룰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일들이 그동안 뒤죽박죽 섞여 버렸다.


이 모든 계획에는 건강 외에도 생각지 못한 변수도 존재할 것이다. 삶은 유한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환경은 변할 것이며, 피할 수 없는 일이 들이닥칠 것이다. 운이 좋아야 노년을 맞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과 현재의 '중년'을 긍정한다. 이 모두가 축복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은 죽음을 의식할 때 더욱 확고해진다고들 한다. 동의한다. 기대 여명이 기대보다 길지 않음을 확인했음에도 노후, 건강,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서 조금 벗어난 기분이다.



"연구에서 꼽았던 성인기의 중요한 생활습관 요인을 종합하면 금연, 적정 체중 유지, 충분한 신체활동, 절주, 균형 잡힌 식사, 충분한 수면, 과도하지 않은 스트레스, 약물 중독을 피하는 것, 적절한 사회 관계망을 들 수 있다. 생활 습관 요인의 수명 예측력은 노년기에도 유지된다. "


처한 상황에서 무리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건강한 생활 습관을 찾아간다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건강 수명"을 연장하여, 남의 손을 빌려야 유지되는 시간(임상 노쇠 척도 중 타인의 도움이 요구되는 단계: 중등도 노쇠, 중증노쇠, 초고도 노쇠, 말기환자)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불로장생이 아닌 삶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건강 수명"의 연장이 아니겠는가. 그걸 말하고 싶었던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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