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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흔들리고 밥 먹듯 생각하기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우에노 지즈코. 이주희 옮김, 동양북스. 2

by 묻는 사람 K

사람들이 왜 내 아버지 죽음을 부러워할까에 대해 곱씹곤 했다. 처음엔 그저 위로의 말이겠거니 했다. 아버지는 떠났고, 남겨진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했듯이 각자 방식대로 위로하고 위안받으면서 견뎌가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니겠나 생각했다.


"복 많은 사람은 죽을 복도 있는갑다."라고 이모가 말씀하셨을 때 "아빠도 살이 바짝 마르도록 아팠어요."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익숙한 집'과 '가족 곁에서' '주무시듯' 가셨다는 게 핵심이라는 걸. 익숙할 뿐 아니라 계절 변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산과 가까운 집을 아버지는 무척 좋아하셨다.


불안이 높을 수밖에 없는 환경과 가족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 불안도 충분히 이해된다. 나 역시 아버지께서 그러하셨듯 (불안을 낮추기 위해) 계획하고, 단속하고, 통제하고, 확인하는 습관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는 죽음과 이별 이슈와 만나면 발작 수준으로 급 상승했다.(나는 헤어질 때 인사조차도 '안녕'이라는 말대신, '또 만나'라고 한다.)


연이은 이별을 통해 죽음은 현실이고, 피할 수 없으며 나 또한 비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슬프고, 가슴 저미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음을 수용하고서 조금 평온해졌다. 앞으로 내 죽음뿐 아니라 의미 있는 이를 떠나보내는 경험을 몇 번 더 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떨까? 그들은 어떤 형태의 마무리를 원할까?


<< 혼자 집에서 죽기를 권하다.>>는 이런 생각을 구체화하는데 디딤돌이 된 책이다. 확고했던 부분에 균열이 생겼다. 으레 삶의 마무리는 병원의 하얀 침대 위에서,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에 둘러싸여, 고통을 줄여주는 링거를 맞으며, 간단한 말을 힘없이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는 형태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아니 이상적이라고 여겼다. 저자는 이 당연함에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 사회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 삶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죽으면 가족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자세히 목격할 수가 없다. 병원 영안실에서 장례식장으로 직행하기 때문에 죽은 이와 함께 할 기회가 없다. 당연히 죽음이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다."


남편 오랜 친구인 K의 아버지도 지병으로 투병 중이다. 자녀들은 요양 병원으로 모시길 권했으나,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몇 년째 집에 계신다고 했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져서 괴롭다고도 했다. 물론 노쇠한 어머니를 염려한 말이기도 했다. 그간의 사정은 알 수는 없으나, 최근 재택사에 대한 정보를 물어왔다.


나 역시 재택사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귀동냥으로 얻은 막연한 정보만 있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집에서 돌아가시면 사망진단서를 받기 어렵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고 가족이 용의자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시신을 장례식장까지 운반하는 비용, 사망 진단서 비용까지 막대한 돈이 든다. 매우 번거로운 일이다. 다수가 따르지 않는 방식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경험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재택사는 범죄 연루 가능성 때문에 경찰과 과학 수사대가 나와 조사한다. 사망을 확인해 줄 의사가 절차를 진행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시신은 구급차 이송이 안되므로 장례식장까지 이동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사망 진단서 발급에도 병원사보다는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하지만 사망 직전까지 무의미한 병원 처치를 받는 것과 비교하면 어떨까?


고령의 아버지가 일상을 지낸 공간에서 마지막까지 안정감을 느끼셨다는 점은 큰 위안이 된다. 되돌아봐도 충분히 감당할만한 일이었다. 그동안의 진료 내역과 쌓인 약봉지 등을 확인한 경찰 수사는 번거롭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되레 형사의 위로와 절차에 대한 안내는 우왕좌왕하는 가족에게 도움이 되었다. 종합해 보면 비용 차원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익숙한 자기 집에서 생활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데, 죽을 때만 갑자기 온 친척과 지인에 둘러 싸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도 말한다."(중략) "진짜 중요한 것은 사후에 빨리 발견되는 게 아니라, 살아생전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허약해져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문명사회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리 하라고도 조언한다. 죽어가는 사람 붙잡고 눈물 흘리며 말하기보다 아프기 전에 말해주는 게 좋단다. 모르지 않았으므로 뜨끔했다. 그 외에도 재미있는 통계, 임종기의 과잉 의료, 성년 후견인 제도, "존엄한 생과 존엄하지 않은 생의 경계선"과 같은 묵직한 화두를 던져주었다.


아버지 평온한 안식은 마지막 순간 현명한 판단을 내린 엄마 덕이다. 나라면 '죽지 못하는 고통'을 기어이 주면서라도, 한낱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 했을 거다. 두 분은 원하는 방식의 임종에 대해 이야기해 오셨고, 뜻이 달라도 상대 의견을 존중하셨다. 이런 면에서 아버지는 복이 많으신 게 분명하다.


요즘 나는 살아있는 동안 고립되지 않고, 마음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단정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을 자주 생각한다. 얼마 전 집에 놀러 온 지인들에게 '스머프 마을'처럼 옹기종기 모여 살자고 농담처럼 말하 이 책을 권했다. 그리고 연말에 이야기 나누자고 약속했다. 흔들리고 생각이 바뀌더라도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밥 먹듯 생각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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