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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결심

고요한 읽기. 이승우. 문학동네. 2024.

by 묻는 사람 K

엄마 달라졌다. 아빠가 계셨을 때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 마음이 쓰였다. '멸치 볶음했는데 가져갈래?' 파김치 담갔는데 언제 올 수 있어? 아빠가 안부차 전화 하실 때면, 바쁜 귀찮게 한다며 타박하던 엄마였다. 아빠는 부재를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남편에게 푸념했다.


사소한 결정도 자식들에게 되묻고야 안심했다.'의존'이 문제 될 건 없었지만, '변화'이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 하나 더 있었다. 정치 사안에서만큼은 거칠고 난폭해졌다. 궁지에 몰린 들짐승처럼 사나워지는 모습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날것의 낯선 반응 마주할 때면 아빠가 더욱 그리워졌다.


"사람은 다 자기 말을 한다. 그래서 번역이 필요하다. 번역 없이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의 말은 없다. 여기서 번역은 헤아림을 뜻한다. 말하는 사람의 언어가 놓여있는 상황에 대한 주의 깊은 배려. 잘된 번역은 말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을 잘 옮긴 것이다."


24년 11월 8일 갑작스러운 대통령 담화가 있었다. 무제한으로 진행되는 사과 기자회견이라고 했다. 기대는커녕 궁금함도 없었지만, 매체에서 쏟아내는 뉴스와 화제 영상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날리면' 사건을 겪었고, 300만 원 명품백을 '조그만 파우치'라 두둔한 박장범 앵커가 KBS사장후보가 되는 것을 목격했다. 수장의 잦은 거짓말이 드러나도 문제 삼지 않는 언론 앞에서 무슨 희망을 품겠는가.


이해하려고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수치심과 치욕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나 또한 생존을 위해 노력했다. 국민 앞에서 눈물로 사과했던 이가 영부인이 된 후 '주가조작, 공천개입 등 무수한 의혹이 쏟아졌다. '무식한 우리 오빠, 지가 뭘 안다고' 수시로 타인과 나눈 민망한 통화 녹취를 들은 국민을 향해 "아내 순진한 면"이 있고 "악마화된 거"라고 말했다. 그와 내가 사용하는 말엔 번역 필요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 땅, 사람과 물자만 점령한 것이 아니라 언어 또한 훼손했다.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면서 말을 바꾸었다. "소녀, 딸을 뜻하는 베트남어 '꽁가이'가 매춘부를 의미하게 된 것이 한 예이다. 이들에 의해 이 단어는 매춘부의 뜻으로 더 많이 쓰이다가 나중에 매춘부라는 뜻으로 굳어졌다. (102쪽)" 자신의 딸에게 꽁가이라는 낱말을 더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해서도 남편을 오빠라고 불렀다. 언니만 둘인 내게는 유일한 오빠이기도 했고, 나름 환상도 있었으며, 여보나 자기야 보다는 덜 낯간지럽고 무난해서였다. 또한 연상인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겨있다. 헌데 영부인의 오빠 논란 이후 무심결에 '오빠'를 부르곤 흠칫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오빠'라는 낱말의 의미값이 추락한 탓이다.


"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 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엄마 위해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려고 결심했다. 엄마의 확신 응원한다. 스스로 흔들리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붙들고 살아온 신념과 소신, 철학이 부정당한다고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좌절감을 느낄 바에야 차라리 사납고 비이성적으로 공격하는 쪽이 낫다. 변했든 달라졌든 아무래도 괜찮다.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나를 화나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보수의 가치를 추락시키는 소수이다. 엄마처럼 한 시대를 충실하게 살아온 이들, 중심의 자리를 다음세대에게 기꺼이 내준 이들, 개인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이등 시민으로 살고 있는 이들의 고단함, 설움과 분노, 불안과 공포를 부추기며 그 힘을 이용하는 특정 집단 비열함을 용서할 수가 없다.


돌아가시지 몇 달 전, 아빠와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라고 하셨다. 깊은 탄식과 한숨을 들었다. 시아버지는 마지막 투표 기회가 있었지만, 처음으로 투표 장에 가지 않으셨다. 자식들은 짓궂은 농담을 했지만, 쓴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셨다. 나는 엄마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엄마의 소신이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순진하게 낙관하지 않는다. 잘못한 이들이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날이 빨리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순간을 모면하는 거짓말이 불러올 파장도 수학계산처럼 정확한 결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부패한 기득권의 힘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쉽게 오지 않더라도 반드시 올 거라는 확신으로 현재를 산다. 11월 15일 이재명 대표의 어이없는 1심 판결을 지켜보며 어쩌면 '먼 미래'가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까지 지치지 않을 것이다. 계속 살아갈 것이다.



"언제까지 걸을 거라고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걸으면 된다. 언제까지 쓸 거라고 미리 결심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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