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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삶

by 묻는 사람 K

여의도 아줌마이자, 엄마 절친이 돌아가셨다. 벌써 두 달이 지났다고 했다.

1940년생 엄마의 고등학교 친구이니, 나보다 엄마를 더 오래 알아온 특별한 분이다.

아줌마에게는 나와 동갑인 딸, 두 살 많은 아들이 있다.

한때 친구였으나, 지금은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 몰라 볼 희수는,

엄마와는 자주 만났고, 큰 언니와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아줌마의 남편은 몇 년 전 사소한 문제로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일은 모두를 놀라고 당황스럽게 했다.

병치레가 잦고 마른 아줌마보다 활력 있던 아저씨가 먼저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 엄마는 자주 아줌마를 만나러 가셨고, 가지 못한 날에는 전화 통화를 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만남도 전화도 더 빈번했다.

나는 그저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엄마가 간병인과 통화하는 것을 몇 번쯤 들었다.

침대에서 넘어지신 이후 입원 생활이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

집이 아닌 병원으로 몇 번 가시더니 어느 순간 발걸음을 끊으셨다.

통화도 아줌마보다는 간병인 혹은 딸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 전화하기가 무서워, 안 할래"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엄마만 빠져있는 가족 단톡방에 여의도 아줌마 사십 구제였다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바로 이어, 엄마에게 어떻게 할까?라고 물어왔다.

모두 침묵.

나는 별다른 대책도 없으면서 '일단 아무 말도 하지 말자.'라고 썼다.

그리고 후회했다.


한때 친구였으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여의도 아줌마 딸은,

우리 엄마가 걱정되어서 장례식에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라면 엄마의 마지막이 외롭지 않도록, 조금의 고민도 없이 연락했을 것이다.

단 한순간도,

남아있는 사람의 입장이나 마음 따위를 고려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엄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평소와 달리 오랫동안 가로등 밑에서 나를 배웅하셨다.

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돌아볼 때마다 손을 흔드셨다.

그럴 일 없겠지만, 이 모습이 마지막이면 어쩌나 싶은 불안과

지독하게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일상이 그리웠다.

엄마는 손을 흔들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언젠가 시아버지께서 그러셨다.

"바둑 두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다 배렸어."

그 외로움이 그저 외로움인 줄만 알았다.

다른 무엇으로 채워드릴 수 있을 줄 알았다.

엄마 주변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떠나는 걸 보고서야.

그 외로움은 고통일 수도 형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오백 년 사는 것도 아닌데,

이 짧은 순간일 뿐인데,

그럴 줄 알았던 일과 그럴 줄 몰랐던 일이 훅훅 치고 들어온다.

삶이 가르쳐준 고통스러운 교훈 앞에서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철딱서니 없이 신만 원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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