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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아름답지만 슬픈가, 아니면 슬프지만 아름다운가.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지음), 정영목(옮김) 다산책방

by 묻는 사람 K

믿을 수 없겠지만, 하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분명 아빠의 목소리였다.

짧았지만 또렷했다.

내 이름이었는지, 단마디 외침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 목소리를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른 아침이었고 아무도 없는 집이었다. 때문에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흔한 일도 아니었지만.


"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


어렵게 꺼낸 김에 좀 더 말해보자면,

붐비는 길을 걷다가 아빠 특유의 향기에 멈칫한 적이 있었다.

이 또한 자주는 아니었고 드물게 몇 번이었다.

그땐, 비슷한 로션이나 향수를 쓰는 사람이려니 하고 넘겼다.

싫고 좋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고, 피차 난처해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 자신이 믿는 것을 믿기 위해, 스스로를 계속 매일 조금씩 속여야 한다. "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를 읽고,

한동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헝겊 보자기를 열었다.

아빠가 남긴 흔적의 일부.

사 남매 중 누구도 탐내지 않았던, 존재는 알지만 관여하고 싶지 않아 했던,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공책, 낱장의 메모들, 여러 권의 수첩

몇 번 꺼내보려다 넣어두곤 했다.

슬퍼서도, 사무친 그리움 때문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단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기로 남은 글과 문장이 되지 못한 낱말, 마무리되지 못한 글자들이 규칙 없이 쓰여있었다.

시구나 유행가 가사, 건강 관련 정보로 채워진 수첩들

신문에서 오려둔 기사가 접힌 채로 사이에 있기도 했다.

여백으로 남은 종이를 보면서,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무엇으로 채워졌으려나 상상했다.

이 속에서 어떤 내용이 발견되어도 놀라지 않을 걸 안다.

다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일이 한 가지 더 늘어날 뿐이겠지.

23년 5월 9일 이후, 한동안 멈춰 있었던 내 삶으로 아빠를 다시 소환한다.


"삶을 견디게 만드는 건, 고결한 진실이 아닌 무모한 믿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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