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크리스마스

by 묻는 사람 K

계획대로 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게 많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매년 다이어리를 사고, 매달, 매주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한다. 오랜 습관이다.


계획이라 하기도 뭣하지만 그 정도의 틀은 있어야 불안을 조절하며 살 수 있다.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대체로 수첩을 바꾸는데, 올해도 11월을 앞두고 그렇게 했다.


이번 여행에는 도서관과 커피 마실 곳 몇 군데를 빼고는 정해두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렬하게 아무것도 하 싶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까지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다.


어제부터 한쪽 귀에서 통증이 느껴지더니, 점점 심해졌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피로하면 염증이 재발할 수도 있을 거라 했는데, 왠 걸! 이번엔 오른쪽 귀다!

급한 마음에 쳇 gpt와 증상을 의논했다. 성격 급한 남편보다 나을 것 같아서였다. 이런 젠장! 녀석이 한술 더 떠서 응급실로 가라고 파닥거렸다.


녀석을 진정시키고, 남편과 의논 끝에 하루 이틀 지켜보기로 했다. 비싼 여행자 보험, 쓸데 있겠느냐고 농담했는데, 이래서 옛말이 틀리지 않는가 보다.


온종일 책을 읽었다. 차를 마시고 가끔 창밖을 보고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구경했다. 중단 없이 읽고, 영화를 볼 수 있는 게 얼마만이었더라?


한동안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120분가량의 러닝 타임은 물론, 주의를 기울여야 이해되는 내용도 감당할 수없었다. 보름 넘도록 씨름해야 하는 책도 태반이었다.


해가 질 즈음 동네를 산책했다. 문구점을 지나다 26년도 다이어리를 다시 샀다. 내게 충동구매는 드문 일이지만, 계획에 없던 염증도 생긴 마당에 원칙 따위 뭐 문젠가하면서.

크리스마스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려고 했다. 하나, 내일 아침 귀 상태가 계획을 따라줄지 모르겠다. 행여 틀어진다 한들 어쩌겠나. 애초 인생엔 계획대로 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게 많은 것을!


그저, 따뜻한 크리스마스! 그걸로 됐다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