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속살의 구아바를 자르다가, 이 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잠깐 사이에 푸룻 한 향기가 퍼졌다. '산미가 약간 느껴지면서 청량해, 장미 향과 배맛이 섞인 느낌이야'
일상에서 일을 빼고서야 내게 있는 건 가족과 친구들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항상 우선순위에는 일이 있었다. 그걸 제대로 해내는 게 가족과 친구들을 위하는 거라고 오해했던 것 같다.
일에서 벗어나고서야 나는 지키지 못한 약속을 담아두는 사람이라는 것이 선명해졌다. 아빠가 원하셨던 흔들의자를 사드리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리고, 민경이가 선유도 공원 오리배를 타자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진심이었으나,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은 차곡차곡 내 안에 슬픔으로 남았다. 당사자는 잊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가끔 나를 붙든다.
시장에서 사 온 구아바를 자르다가 하얀색이 아닌 분홍빛이 도는 걸 보고, 엄마에게 어떻게 알려드릴까 고민했다. 복합적인 풍미만큼 낱말을 긁어모아도 설명할 수 없어서 '엄마, 이번 여름에 나랑 같이 와'라고 대신했다.
겨울은 우리 두 사람에게 너무 긴 시간이라서, 혹시 지킬 수 없는 약속으로 남을까 봐 서둘러 동의를 구했다. 여름의 약속이 지켜지면, 다시 겨울로, 그 약속이 지켜지면 또 다른 여름으로 이렇게 쪼개가며 약속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지키지 못한 무수한 약속, 그래도 그때는 진심이었다는 걸 당신은 믿어줄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시간이 많을 거라고 믿었던 쪽은 언제나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