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때였다. 더듬거리며 내 이름을 읽고 쓰자 가족들이 신기한 듯 몰려들었다. 앞다투어 다른 글자도 써보라며 종이를 들이밀었다. 기대에 찬 눈빛,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들렸던 탄성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섯 살 무렵엔 웬만한 한글을 줄줄 읽었다. 달리기는 또 얼마나 재빨랐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처럼 사라지기 일쑤였다. ‘저 애는 뭐가 돼도 되겠어.’ 동네 사람들 반응에 어머니는 한껏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챘겠지만 전부 지어낸 말이다. 뭐 하나 빠른 게 없던 나는 상상에서조차도 이런 꿈을 꾸지 않았다. 걸음마 하기, 눈 맞추기, 옹알이 모두 늦되었다고 했다. 말문도 하도 더디게 트여 병원에 데려가셨고, 연령에 맞지 않는 발달 속도에 애를 태우셨다고 했다. 조기 교육 열풍이 불던 시절,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서야 겨우 이름 석 자를 쓸 수 있었단다. 많은 아이가 제 이름과 한글뿐 아니라 알파벳을 쓰고 읽었지만, 나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고 했다.
조급해진 어머니께서는 ‘일일 공부’에 ‘받아쓰기’를 펼쳐 놓으시곤 책상 앞으로 나를 끌어다 앉히셨다. 몇 분 만에 속이 터진다며 파리채를 찾아드셨다. “저래서 사람 구실은 하겠나.” 하시다가도 자식이 넷이나 되니 ‘다 빠릿빠릿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 협상과 타협을 반복하셨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마음을 비우셨고 내 삶도 편안해졌다. 그저 건강하고 씩씩하게만 자라면 된다고 하셨다. 물론 어머니의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씩씩하고 건강했지만, 기민하고 민첩하지 못했기에 삶에서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포기가 빠른, 바꿔 말하면 적응력 뛰어난 어머니 덕분에 나는 비교적 평온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삶 속에서 무리수를 두는 일이 거의 없었다. 꿈은 꾸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않았고, 욕심을 내지만 결과에 순응했다. 어머니 기대에 부응하는 '빠릿빠릿한 녀석'이나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헐렁한 애'이거나 관계없이 고르게 사랑받으며 자랐다. 물론 골고루 야단도 맞았다. 하지만 적어도 능력이나 성취를 비교당하진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의 양육관을 복귀해 보면, 나는 가끔 놀란다.
자식을 넷이나 키운 '프로 양육러'인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부모 노릇은 힘들다고 하신다. 나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가 존경스럽고 좋다. 어렵고 힘든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낳기만 하면 어떻게든 살 게 된다거나, 자기 복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섬뜩하다. '어떻게든 살 게 되는 삶의 여건'이 아무 선택권 없는 아이에게는 가혹한 일이다. 최소한의 기본권이 확보되어야 한다. 신체적, 정신적, 물리적, 환경적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조건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부모 욕심과 결핍을 투사하지 않을 판단력, 상대에 대한 분노를 아이에게 쏟아붓지 않을 절제,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해서 가르쳐 줄 수 있는 분별력, 아이와 교류할 수 있는 공감 능력, 위험 요인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책임감, 적절한 시기에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지혜, 실수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인내와 융통성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하게 자기 마음과 생각을 점검하고 돌 볼 줄 아는 부지런함이 있어야 한다.
생각을 마무리할 때 즈음, 경상남도 창녕군 아홉 살 아이를 향한 가정 폭력 기사를 읽었다. 주린 배를 편의점에서 허겁지겁 채웠다는, 아슬아슬하게 베란다를 통해 탈출했다는, 손을 지지고 쇠사슬로 묶여있었다는 내용이 줄줄이 쏟아졌다. 부모 역할에 대해 고민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졌다. 그 아이를 떠올리자 공허한 말장난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부모 역할은 어려운 일이므로,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부모 노릇보다 더 힘든 일은 '사람답게' 사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저 부끄럽고 미안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