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으로 포장하기도 어려운 내 비겁한 언어 습관 중 하나는 '귀엽다'의 무분별한 남용이다. 까르르 웃는 아가, 앙증맞게 걸어가는 강아지, 어슬렁 거리며 주차장을 능청스럽게 휘졌고 가는 길고양이처럼 정말 귀여운 것에 감탄한다면 문제없겠으나, 그렇지 않을 때에도 심지어 쓰지 말아야 하는 순간에도 나는 무책임하게 귀엽다는 말로 상황을 무마해 버린다.
미성숙한 태도를 보이거나, 아름답지 않지만 맥락 상 칭찬이 필요할 때에도 서슴없이 말한다. 때때로 감탄사까지 섞어가면서 오버할 때도 있다. 왜 저러나 싶을 때도, 철없어 보일 때도, 웃기는 걸 봐도, 어처구니없을 때도 다른 낱말을 고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내뱉고 본다.
책임지고 싶지 않거나,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다. 불필요한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을 때마다 만만하게 꺼내 쓰다 보니, 귀엽다는 표현은 이미 오염되었고 의미는 퇴색되었다. 상대방이 쓰는 말조차 의심하고 나름의 해석기를 돌리는 걸 보면 중증이지 싶다.
언어의 오염은 게으름과 비겁함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상황과 때에 맞는 정확한 어휘를 적절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사용해야 했다. 요즘 범람하고 있는'2차 가해'라는 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엉뚱한 곳에서 지나치게 소모되는 것을 볼 때면 머릿속이 쭈뼛해진다.
문제에 대해 정확히 알려고 해도, 증거를 공개하라는 것도, 의심하는 것도, 진위 여부를 묻는 것도, 문제 제기도 2차 가해라고 했다. 정당에 소속된 사람과 정치색 띤 변호사를 병풍으로 세운 채 피해를 주장하면서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2차 가해라고 명명했다. 심지어 침묵조차도 말이다.
이십 년간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를 만나면서 우리나라에도 미투 운동이 시작된 걸 환호했다. 변화의 바람이 시작되었구나 싶어 설렜다. '성 인지 감수성'이란 낱말이 대중화되면서 앞으로 더 나아질 일만 있겠구나 낙관했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2차 가해, 미투 운동을 오염시키고 훼손하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오염된 언어는 그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공격과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남용된 언어는 뒤틀리고, 본 연의 의미를 흐려 버린다. 본질을 잃은 낱말은 절실하게 필요한 이들조차도 쓸 수없게 만든다.
'그런 식의 표현은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공격입니다. 지금 2차 가해를 하는 거라고요.' 핏대 세우며 피해자를 대신해 싸우던 나는 큰 무기를 잃어버렸다. 오염시킨 언어를 일상 속에서 함부로 뱉어 버린 내 책임도 피할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