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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는 사람 K Nov 14. 2021

끝내, 문 앞에서

도어, 서보 머그더 장편소설, 김보국 옮김. 프시케의 숲. 2019.

 '신형철 평론가'때문이었다. 엄밀히는 그의 추천사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거슬러 올라가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모임에서 함께 읽게 된 그의 책 우리는 좋아했고, 그 여세는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로 이어졌다. 각자 앞 다투어 읽은 감상을 공유했다. 그리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신뢰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모임이 있던 날, 호스트였던 S가 말했다. "그의 추천사 때문이었어요. 순전히 그것 때문이었다고요."

통상적으로 세네 권의 후보를 내고 투표로 읽을 책을 정하는 방식과 달리, 단 한 권으로 정해지는 일은 흔치 않았다. 모두 흔쾌히 동의한 데에는 호스트와 같은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호기롭게 을 펼쳤던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번역서만큼은 제법 읽었던 터라, 나름 번역체 내공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두세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쉽게 와닿지 않았다. 그것도 꽤 자주.


 결국, 책 전체 페이지를 남은 모임 날짜로 나누어 읽는 쪽으로 방법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하루에 35쪽씩만 읽으면 된다는 거지!'  표지에 "마타"라낙서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며칠을 들고 다니며 책과 씨름했다. (마타도어라니! 80년도에나 할 법한 재미없는 장난을.... 아!... 남편....) 


 누군가는 인생 책이라고 했다. 문장이 좋아서 여러 번 곱씹었다고도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모두가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인생 책이 내게도 좋으리라는 법은 없는 거구나 싶었다. 이 또한 어떤가, 이것이야 말로 책의 묘미가 아니겠나.


 모임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음에도 책에 관한 내 첫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과 다를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안다. 그저 지금의 내게는, <도어>가 "마타도어"와 "여자 조르바"로만(이 역시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 때문이다. 그 시각에서 결국 벗어날 수 없었다. ) 남았지만 말이다.

 

 낯선 헝가리 소설, 그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다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뽑은 이 책 최고의 장면은 에메렌츠가 폴레트의 죽음을 대하는 부분과 어린 암소 에피소드이다.  사소한 경험이 쌓여 태도가 형성되고, 거기에 환경이 더해지면서 복잡한 인간이 만들어지는 듯하다. 그러니 누군가를 온전히 안 다는 착각은 얼마나 오만하고 위험한가. <도어>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자꾸만 말을 거는 책이다.


"만약 그녀가 삶은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한다면, 누구에게도 그걸 막을 권리는 없어요."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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