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문 앞에서
도어, 서보 머그더 장편소설, 김보국 옮김. 프시케의 숲. 2019.
'신형철 평론가'때문이었다. 엄밀히는 그의 추천사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거슬러 올라가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모임에서 함께 읽게 된 그의 책을 우리는 좋아했고, 그 여세는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로 이어졌다. 각자 앞 다투어 읽은 감상을 공유했다. 그리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신뢰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모임이 있던 날, 호스트였던 S가 말했다. "그의 추천사 때문이었어요. 순전히 그것 때문이었다고요."
통상적으로 세네 권의 후보를 내고 투표로 읽을 책을 정하는 방식과 달리, 단 한 권으로 정해지는 일은 흔치 않았다. 모두 흔쾌히 동의한 데에는 호스트와 같은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호기롭게 책을 펼쳤던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번역서만큼은 제법 읽었던 터라, 나름 번역체 내공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두세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쉽게 와닿지 않았다. 그것도 꽤 자주.
결국, 책 전체 페이지를 남은 모임 날짜로 나누어 읽는 쪽으로 방법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하루에 35쪽씩만 읽으면 된다는 거지!' 책 표지에 "마타"라는 낙서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며칠을 들고 다니며 책과 씨름했다. (마타도어라니! 80년도에나 할 법한 재미없는 장난을.... 아!... 남편....)
누군가는 인생 책이라고 했다. 문장이 좋아서 여러 번 곱씹었다고도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모두가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인생 책이 내게도 좋으리라는 법은 없는 거구나 싶었다. 이 또한 어떤가, 이것이야 말로 책의 묘미가 아니겠나.
모임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음에도 책에 관한 내 첫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과 다를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안다. 그저 지금의 내게는, <도어>가 "마타도어"와 "여자 조르바"로만(이 역시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 때문이다. 그 시각에서 결국 벗어날 수 없었다. ) 남았지만 말이다.
낯선 헝가리 소설, 그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다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뽑은 이 책 최고의 장면은 에메렌츠가 폴레트의 죽음을 대하는 부분과 어린 암소 에피소드이다. 사소한 경험이 쌓여 태도가 형성되고, 거기에 환경이 더해지면서 복잡한 인간이 만들어지는 듯하다. 그러니 누군가를 온전히 안 다는 착각은 얼마나 오만하고 위험한가. <도어>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자꾸만 말을 거는 책이다.
"만약 그녀가 삶은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한다면, 누구에게도 그걸 막을 권리는 없어요." (1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