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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는 사람 K Nov 14. 2021

편집자와 나 사이엔 오해가 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이슬아. 남궁인. 문학동네. 2021.

 올곧게 살려는 남자와 자유분방하고 싶은 여자. 그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 만든 책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었다. '남궁인', '이슬아' 두 사람 모두 충분한 매력만큼 적지 않은 팬덤을 가지고 있으며, 내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음에도 이 책으로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좋아해서 수시로 꺼내 보기도 하니, 서간문에 대한 거부감은 아닐 텐데 그 이유가 뭘까?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거지? 독서 모임 날짜가 정해지고 만남을 기다리는 동안 종종 내게 묻곤 했다. '왜 그래?....'  


 물음에 대한 답은 싱겁고 간단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를 아무 상관없는 내가 '엿보는 기분이' 든다는 것, 나는 그럴 의도와 의지가 없을 뿐 아니라, 호기심도 없다는 것! 무엇보다 이 찝찝한 마음은 두 사람의 인간적 매력과 탄탄한 필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시스루룩, 시스루 가방을 좋아하지 않고, 앞으로도 가까이할 것 같지 않다. 타인이 가방 속에 어떤 걸 넣고 다니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고, 나 또한 드러내고 싶지 않다. 비슷한 맥락에서 관찰 예능도 보지 않는다. 예민함이 극에 달할 때는, 전 국민을 관음증 환자로 만들고 있다며 화를 내기도 한다.


 모든 관계 속에 내가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설령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상대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끔찍하다. 심리적 안정감은 '적절한 경계와 적당한 숨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에서 이상한 쪽으로 튀어버렸지만, 문학 동네에서 출간된 이번 에세이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잘 나가는 두 작가를 엮어 놓은 것 말고는 기획력이 돋보이지 않아서다. 이 책에는 독자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읽는 내내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간 듯했다. 읽는 이를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초청이었다.


 나는 성실한 사람에 대해서는 소위 "까방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작가에게는 1g의 불만이 없다. 심지어 글의 곳곳에서 개성과 성실함이 묻어 나왔다. 이들에게 위로받고, 즐거움을 얻고, 건강한 자극을 받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많았으면 좋겠다. 그 영역에서 각자 스타일로 글을 쓴다면 나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독자가 될 것이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에서는 이슬아, 남궁인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대에 대한 오해의 간극을 줄여갔다. 하지만 그 오해는 책을 만든 편집자(혹은 기획자)와 책을 읽는 나에게로 옮겨 오고 말았다. 문학동네에서 만들어질 무수한 책 중 다음번 내 손에 들어올 책에서는 이 오해가 풀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덮는다.


"적어도 자신의 세계에서 동어 반복하며 배회하지 않으려면, 그러다가 불시에 악과 어둠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끝없이 갱신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불의에 둔감해질 때, 우리의 존재는 휘발될 것입니다. (76쪽)


저는 피곤할 때 어리석어지네요. 체력이 인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 튼튼해지고 싶어요. 바쁠 때에도 상냥함을 잃지 않고 싶으니까요. 선생님처럼요.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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