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의 풍경들
요즘,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졸음이 밀려들면 달콤한 것들을 자꾸 입에 넣게 된다.
초콜릿, 사탕, 젤리 같은 것들.
허기라기보다는, 습관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이른 아침, 세수를 하다 코끝에 손이 닿았다.
따끔한 감각이 스쳤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코끝이 붉게 부어 있었다.
그 붉은 기운이 우스꽝스럽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문득, 옛날 드라마 속
술에 취한 아저씨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볼이며 코끝이며 발그레해지는 그 장면들.
비록 나는 그런 얼굴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을 시작으로,
술에 얽힌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지만
그 잔들 곁에 있었던 순간들은
대체로 좋은 기억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몸이 먼저 거절한다.
한 모금만으로도 속도가 느려지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내 안에서 무언가가 어긋난다.
그럼에도 이상하다.
기억 속 술들은 대체로 좋은 모습이 스며 있다.
맥주는 여름 저녁.
캔을 따는 소리와 함께 터지던 웃음.
소주는 묵직한 회식 자리,
잔을 기울이던 얼굴들 사이로 흐르던 온기.
동동주는 산이었다.
정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건네받은 한 잔.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꿀꺽 마시던,
말보다 땀이 더 많았던 시간.
청하는 야간근무가 끝난 아침,
당직자들과 동이 튼 아침을 맞이하며,,
고단한 몸 위로 그 잔이 놓였을 때의 정적.
고량주는 향으로 남았고,
붉은 와인과 화이트 와인은
어느 저녁의 식탁 위에서
다정한 순간 곁에 있었다.
술의 맛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건 그 옆에 있던 풍경들이다.
그 옆의 장면들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다.
잔을 든 손보다,
그 순간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의 숨결과 말투가 더 오래 남았다.
그래서인지
술은 내게 언제나 조금 아득하고,
그립다기보다는
추억의 되새김 같은 어떤 감정이었다.
나는 술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억들 속에서 내가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살면서 적당히 술의 곁에 있어봤고,
어느 여름 저녁, 겨울의 파티,
회식 자리, 산 위의 허기진 한 점을
조용히 안에 품고 돌아왔다.
입안에는 술맛이 남지 않았지만,
그 풍경들은 나에게 오래 남았다.
어쩌면 나는,
술이 아니라,
술에 깃든 순간들을
오래도록 사랑해 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올여름엔,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한두 잔쯤 마셔볼지도 모르겠다.
술을 즐기진 않지만,
이상하게도, 좋아했던 이름 하나는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