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배우는 중입니다
문득, 책상 한편에 쌓아 두었던 지난 몇 달의 탁상달력을 꺼내본다.
페이지마다 빽빽하게 채워진 글씨들, 검게 덧칠된 일정들과 괄호 안의 작은 목표들.
나는 그날그날의 계획을 하나씩 지우거나 플러스로 채워가며 살아왔다.
성실히, 혹은 버텨내듯.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오다, 갑자기 모든 스케줄이 멈춘 듯한 하루를 맞았다.
벨트를 던져버린 듯한 해방감도 잠시,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나는 또다시 무언가에 쫓기듯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오늘을 그렇게 기다려왔을 텐데,
막상 도착한 이 여유는 낯설기만 하다.
밀려 있는 일들이 아직도 줄지어 있고,
해야 할 것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데도,
나는 느슨한 이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조바심이 난다.
잠시 한 가지에서 벗어난 것뿐인데,
스스로에게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질문을 쉴 새 없이 던진다.
일단 이달은 푹 쉬고, 7월부터 새롭게 달려보자고
다짐했지만, 바쁘게 살아온 몸과 마음은 여전히 가속도가 붙어 있다.
쉬면 안 될 것만 같고, 지금 이 시간을 놓치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
여유를 몰랐던 시간들이 나를 그렇게 길들여 놓았다.
그래서일까, 달력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번엔 채워야 할 일정 대신, 비워낼 공간을 남겨두기로 했다.
그동안 해오던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스스로에게 조금씩 알려주기 위해서.
어젯밤에도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 늦은 시간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벽 3시가 지나고, 4시가 넘어가도록
낮에 마신 커피와 밀크티로
새벽을 방황하며 잠들기 위해 애썼다.
사실은,
내게 주어진 이 조그마한 자유의 시간을
단순히 잠으로만 보내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이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한 달 전쯤 미리 예약해 둔 강연이 주중 어딘가에 기다리고 있고,
가보고 싶던 미술관도 한두 곳 마음에 담아두었다.
의무감이나 생산성 대신,
기대와 환대의 마음으로 이 일정을 맞이하고 싶다.
이번 여름은 특별하지 않아도 좋다.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내게 꼭 맞는 속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를
익숙해지는 연습부터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