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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속을 걸어가다

그러니까, 오운완.

by 그레이스


늦은 저녁, 운동을 놓쳤다

나는 그냥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하루 종일

에어컨 밑에서 숨죽여 지내다가

오늘에서야

이 계절의 더위를 온몸으로 받았다


이어폰을 귀에 넣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걷고 있었다

노래 속에 빠져 더운 줄도 몰랐다


언제 멈췄는지도 모를

귀에 그대로 있는 이어폰과

진공 같은 상태로 둥둥 걷고 있었다


그러다 강바람이 스쳤다

순간 정신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이어폰을 빼고 다시 걸었다


풀벌레 소리와

발밑에서 보드라운 흙이 내 발을 부볐다

숨이 오르내리고 두터운 바람이 지나갔다

모두가 선명했다


나는 비로소 세상과 다시 마주 섰다

그동안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진공 속을 떠다니며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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