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이 건네는 말

오늘도 사랑해

by 그레이스



가족들이 각자의 바쁜 일상으로 흩어진 날, 나는 혼자 아픈 하루를 보냈다. 감기라고 하기엔 어정쩡하고, 그렇다고 온전한 피로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몸 상태. 두통은 잦아들지 않았고, 긴 수면조차 회복을 가져오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눅눅해진 하루였다.


이대로 더 누워 있다간, 아픔보다 무기력에 잠식될 것 같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간단히 옷을 걸치고 동네를 한 바퀴 걸었다. 특별할 것 없는 길이었지만, 아플 때 보는 풍경은 낯설게 다가온다. 걷는다는 행위 하나로 풍경은 감각이 되고, 정적은 언어가 되었다.


집에 돌아오니 시간은 흐릿했다. 점심이라 하기엔 늦고, 저녁이라 하기엔 이른. 입맛은 여전치 않았지만, 무언가를 씹는 것만으로도 나아질 것 같았다. 올리브 치아바타를 구워 달걀프라이와 햄, 치즈를 차곡차곡 얹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식탁에 앉았을 때, 문득 찬장 속 머그잔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잔보다 무겁고, 평소엔 거의 손에 닿지 않는 도자기 컵 하나가 오늘따라 유독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하늘빛이 스며든 듯 조용히 감긴 그 잔. 손에 쥐자, 오래전 기억 하나가 서서히 떠올랐다.

컵의 바닥을 뒤집어보니, 어느새 만들어진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큰아이를 생각하며, 매일 사용하라고 만든 잔이었다.

‘데일리 컵’이라 이름 붙였지만, 도자기의 묵직한 질감은 오히려 일상에서 멀어지게 했다. 매일 곁에 두려고 만든 잔이 매일 쓰이진 않았지만, 그 마음만큼은 매일 곁에 있었다.

그리고 잔의 옆면엔, 흐릿한 듯 또렷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도 사랑해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던 그 문장이,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누구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아이였을까, 아니면 그때의 나 자신이었을까.

그 짧은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자, 마음 한편이 조용히 아려왔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보다, 사랑하고 싶다는 감정이 더 선명하게 밀려왔다.

아픔 속에서도 무언가를 기억하고, 돌본다는 행위.

그건 사람을 살게 하는 본능이자, 살아 있게 하는 감각이었다.


우리 집 찬장엔 그런 컵이 몇 개 더 있다.

여행지에서 무심히 사 온 것, 누군가의 선물, 혹은 특별한 날을 기념해 만든 것.

컵마다 이름은 없지만, 모두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 잔을 꺼낼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시간의 한 겹으로 되돌아간다.

사물은 말을 하지 않지만, 가만히 오래 바라보다 보면 기억이 먼저 말을 건다.

그것은 조용한 손짓이다.


오늘 나는 그 하늘빛 잔에 주스를 따라 마셨다.

입 안에 감도는 맛보다 컵의 무게가 먼저 느껴졌다.

시간이 담긴 무게. 마음이 새겨진 문장.

오늘도 사랑해, 그 문장이 오늘의 나를 붙잡아 주었다.


두통은 여전히 잔잔한 울림처럼 남아 있었고, 몸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조금 나아졌다.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회복이 더딘 하루가, 하나의 잔을 통해 위로받는 날.

나는 다시, 내 이름을 부르듯 말해본다.


오늘도 사랑해, 그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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