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에 올려진 많은 초만큼 부끄러움을 알게 된 내 생일날
고등학교 졸업하고 간 첫 대학은 남녀 공학이었다. 저 멀리 새내기 환영대자보가 눈에 들어왔다.
"오천 학우가 새내기를 열렬히 환영합니다!"
속으로 근심했다.
'언제, 오천 명을 다 사귀지?'
시골에서 나름 도시에 속한 안양서 국민학교 2학년으로 전학했을 때 '촌년'소리 듣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적응 기간을 마치고, 난 늘 새로운 친구 사귀기에 바빴다.
새로운 친구를 향한 갈망은 인터넷 보급과 함께 확 불타올랐다. 나를 거쳐 간 웹사이트는 나의 젊음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28살에 시작된 유학 생활 동안, 공부를 못하는 한이 있어도 공개든 비공개든 일기 쓰기를 거른 적은 없었다. 프리첼 커뮤니티 "코넬에서의 유학일기"에 북동부 뉴욕 주 Ithaca (이타카: 있다~ 가)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프리첼 시대가 가고 싸이월드에서는 일촌 파도타기를 하며 나의 친화력은 최절정에 달했다. 공부 마치고, 한국에서 잠시 영어 선생으로 일했을 때, 몇 십 명, 몇 백명의 학생들에게 겁도 없이 단체로 친구 신청을 했다!
인맥을 넓히고 넓혔던 30대!
40대에 들어서니, 인생의 고단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누리고 즐겼던 것이 달리 보인다. 게다가, 어느 누구의 도움하나 받지 않고 독립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받기만 하던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도덕적 부담감과, 이 험란한 세상 속에 내 입지를 굳혀야 한다는 책임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50대 문턱에 다 달았다.
인생의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짐 내려놓고, 숨을 다시 고르고 있다. 문어발처럼 확장했던 인맥과, 누가 이사 간다 하면 한 발에 기뻐 달려가 받아왔던 물건을 이제는 비워내고 있다.
한 때 내 꿈은 연예인이었다. 살짝 들린 '납작코'로 스크린을 장악하지는 못할지라도, 지하 음원차트를 석권하는 소리 꾼, 마이크로 좌중을 매료시키는 사회자, 깊이 깔리는 중저음으로 다큐를 읽어 내려가는 성우, 웅변으로 다져진 발음으로 사회 경제 문화 정치를 평론하는 아나운서.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는 무릎에 담요 하나를 얹고 빛의 속도로 글을 써 내려가는 작가. 여러 가지 재능을 두루 섭렵한 만능 연예인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욕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자신을 보며, 악플에 시달리는 연예인이 되었으면 어쩔 뻔했나 간담을 쓸어내린다.
이렇게 나는 60 환갑을 맞이할 것이고, 크신 분이 이 땅에서 숨을 허락하시는 한, 삶을 정면 승부하며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손 끝 닿는 대로 쓰고 싶어 몇 자 끄적이는 10월 어느 날. (10/17/2022)
추신: 케이크에 올려진 많은 초만큼 부끄러움을 알게 된 올 해 제 생일 7월 27일에 찍은 사진을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