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학교 세대다

1/5/2016

by 서재진

나는 이름에서부터 연륜이 느껴지는 국민학교 세대이다. 안산국민학교 1학년을 마치고, 학군이 좋기로 유명한 안양 서 초등학교로 위장전입을 했다. 내가 직접 위장전입을 당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난 장관을 하고 싶어도 청문회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친구들한테 우스개 소리를 하고 다닌다. 친척집 주소를 빌어 안양으로 위장전입을 하기까지 내 기억에 부모님께서는 큰 결단을 하셔야 했다. 학년마다 두 학급씩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별다른 경쟁의 식 없이 노력하지 않는 사 남매를 위해서, 불편한 교통편을 마다하고 위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신 덕에, 이미 중학교 배정을 받은 큰 오빠를 제외하고 작은 오빠, 언니, 나는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도 못한 체 안양 서 초등학교로 개학하는 날 전학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실로 나는 큰 문화충격을 받았다. 시골에서 우리들은 제법 잘 사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아이들이 뜨개질 옷을 입고 오면, 엄마가 떠준 털옷이 비싼 담당이 가장 많이 들어가 있어서 복슬복슬한 내 털옷은 부의 상징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런데, 안양 서 초등학교로 전학을 오니, 아이들은 털옷이 아니라 코트를 입고 있었다! 안산 초등학교에서 내 신발은 솜이 들어가 누빈 겨울에 가장 따뜻하고 세련된 것이었는데, 안양 서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은 부츠를 신고 있었고!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예전 시골학교에서는 아빠가 육성회장이셨고, 엄마는 어머니회 회장, 큰 오빠가 전교회장, 작은 오빠 전교임원, 언니도 반장이어서, 나는 식구들만 믿고 방학 숙제를 안 해가도 너무나도 당당하고 뻔뻔한 학생이었는데, 안양 서 초등학교로 전학을 오니, 이제는 너희들이 알아서 혼자 세상을 헤쳐 나가라는 듯 엄마, 아빠의 발길도 뚝 끊기고, 정말 속된 말로, 나는 기댈 곳 없는 촌년이었다!


촌년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어린 내가 얼마나 발버둥을 쳤던가!


전학 오자마자 새로운 반 친구들과 선생님께 나란 사람을 알려야 하는데, 알릴 길이 없어 떠드는 사람 이름을 적어 선생님께 드렸다. 물론 나는 그 아이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나, 몇 번째 줄, 누가 떠들었다고 적어 선생님께 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어느 촌구석에서 날아들어온 신기한 물건을 보듯 바라보셨다.


그 이후로, 적성에 딱 맞는 웅변을 하고, 반장을 하고, 회장을 하고, 전교 부회장을 하면서 나의 꿈은 단연코 돋보이는 사람, 몇 천명 중에 세워나도 가장 빛이 나고 눈에 띄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그 꿈은 변하지 않았다. 여러 초등학교에서 몰려든 아이들에게 나라는 사람을 목숨 걸고 알리기 위해, 맨 처음 영어시간에 ABC 노래를 외울 수 있다고 손을 들고, 정말 잘난 체를 엄청 해댔다. 그리고, 밤마다 하나님께 반장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해서, 중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했다. 1학년때는 정말 하고 싶어서 했고, 2학년때는 선생님께서 하라고 권면하셔서 했고, 3학년때는 원래 하던 사람이 계속해야 한다고 하셔서 했다. 중학교 3학년 끝날 즈음에, 가정 과목을 가르치시는 “심증녀” 선생님께서 마지막 수업 시간에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자며 대뜸 반 아이들에게 설문조사 형식으로 물어보셨다.


“이 반에서 다른 사람의 말은 절대 안 듣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누구야?”


아이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있잖아, 이 반에서 다른 사람 말하는 도중에 말 끊고 자기말하는 사람은 누굴까?”


역시나, 아이들은 묘한 웃음을 감추며 나를 쳐다보았다.


농담 삼아, 우리 반을 서재진 공화국이라고 부르며 학년 중에 우유를 가장 많이 배달시켜 먹는 반, 소년일보를 가장 많이 구독하는 반, 학년말 반평균이 가장 높은 반, 체육대회에서 응원을 가장 잘하고, 구기 종목에서 최다 우승을 하는 반의 반장이 바로 나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는데 반 아이들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에 사뭇 큰 충격을 받았다. 시무룩한 나를 위로하듯 ‘반장 서재진은 싫은데 친구 서재진은 좋아~’라는 이상 야릇한 말로 사람 헷갈리게 하는 친구도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어색한 분위기를 급마무리 하시려는 듯,


“반장 나와서 친구들한테 할 말 있으면 해 봐.”


하셨다. 나는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


“안양여고에 와서 서재진을 찾으실 때는 반장 서재진이 아닌, 반학생 서재진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3년 내내 독재하며 지냈으니, 3년은 공평하게 평범한 학생으로 지내야 제 인생의 균형이 잡힐 것 같습니다.”


라고 그럴싸하게 반장 퇴임 인사를 했다.


안양여고에 들어와서는 입학성적순으로 반 1등부터 5등까지 자동으로 반장 후보가 되어서 난 하고 싶어도 반장을 할 수가 없었다!


단상에 나가서 말하는 것이 속삭이며 말하는 것보다 더 편한 내가, 아이들이 떠드는데 절대 먹히지 않을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로 속상해하며 애를 태우는 “초자” 반장을 보니 내 속이 더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저렇게 하면 안 되지!


반 전체 성적을 올리려면 잘하는 아이들을 뒷받침해주는 것보다 바닥을 톱으로 달리는 친구들 몇 명에게 시험에 나올 것만 집중적으로 외우게 하는 것이 반평균을 올리는 지름길인데, 지금 반장은 반전체 성적 올리는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도 이해가 안 되었다.


앞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옛날 옛적 천문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의 일생을 듣다가 기가 차서 죽을 뻔했었다. 그들의 삶은 내가 추구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온종일 별을 바라보고, 한 점씩 옮겨가며 별의 이동을 평생 동안 그리다가, 대를 물려 자식들이 별의 행로를 그리고, 또 그렇게 한 세대를 마감하고. 빛도 없고 이름도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그 한 곳을 바라보며 지루한 일상을 견디며, 일주일을 살아내고, 한 달, 일 년,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고등학교 방황을 만회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20대엔 미국 유학만이 살 길이었고, 내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유학을 마친 30대 초반은 나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그래도, 명색이 아이비리그 대학원 졸업인데, 어디에 내놓아도 번듯한 무엇인가가 내게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빈털터리 노처녀라는 타이틀뿐이었다!


입학허가서도 없이 정말이지 무모하다는 주변의 걱정을 뒤로한 채 다시 밟은 미국땅에서, 나는 운이 좋게 이민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멀리 돌아가긴 했으나, 다시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하고,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버는 꿈과 현실을 오가는 아줌마가 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내 삶을 돌아보니, 반짝했던 순간보다는 지리멸렬하고 끝이 없어 보이는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관건은 그 지루한 일상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며 매 순간을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였다.


24시간의 하루를 돌아보니, 창조적이고 뭔가 획기적인 일들을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 같은데, 내 일상의 삼분의 일은 수면, 적어도 육분의 일은 음식 섭취, 사분의 일은 해도 해도 티조차 나지 않는 설거지 빨래 청소와 같은 허드레 집안일이었다. 그리고, 남은 사분의 일을 쪼개어 먹고살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며 일을 하고,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용트림하고 있는 내 지적 욕망을 불태우기 위해 막대한 거금을 부어가며 공부를 하고 있다.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조금씩 깨닫는 것은 나 자신을 비롯해서 매 순간 치열하게 일상을 버티어 가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늘 하루도 묵묵히, "멀쩡한 척"하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 의해 인류가 움직이고 있다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당연한 사실이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별이 움직이는 작은 거리를 일생을 바쳐 종이에 옮겨놓은 옛날 옛적의 천문학자와, 해도 해도 티가 안나는 집안일과 매 순간 전혀 새롭지 않은 일상을 묵묵히 견디어 내는 우리네 삶이 별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2016년 한 해도 매 순간 그렇게 묵묵히 탄탄한 일상을 일구어내며 삶을 살아내고 버티어 내길, 견디어 내길 소망한다.


2016년 1월 5일 새해 다짐을 하며.


국민학교 졸업 사진 서재진.jpg

추신: '홍명보' 버젼의 안양 서 국민학교 6학년 4반 서재진 졸업 사진을 첨부합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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