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는 왜 데려 왔어?

by 서재진

방금 전 내 귀를 의심했다. 어젯밤 조곤 조곤 이야기했으며, 또 새벽 단상 앞으로 나가 서로 응답받았다 확신까지 했거늘 본인 직장 그만둔다는 중요한 얘기를 지금 나한테 해달라고 하다니!


되짚어 보니 2002년 남편이 기록한 배우자 기도 제목에 “말을 나보다 더 조리 있게 할 수 있는 자매”라고 쓰여 있었다. 장성한 어린 왕자를 세우시려고 나를 어릴 때부터 웅변으로 맹훈련시키신 것이었구나!


새벽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와 아침 먹고, 나도 꽃 단장하고 은행으로 함께 출근했다. 인사 부장님이 계시는 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우리 남편을 친아들처럼 살뜰하게 챙겨 주셨던 인사 부장님은 나를 보고 반색하셨다. 이른 아침부터 부인까지 대동해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로 상황 파악을 하시느라 분주하셨다.


남편은 진로 걱정하다가 결혼 전에도 사직서 들고 인사과 부장님을 찾아뵌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내가 리처드를 아껴서 하는 말이야. 더 좋은 직장 잡아서 와. 그러면 사직서 받아 줄게.”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사직서를 찢어 버리셨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직할 직장 대신 “말을 나보다 더 조리 있게 할 수 있는” 배우자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앞으로 정해진 길은 없지만, 우리 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직서를 받아 주셨다.


인사 부장님이 계신 곳은 벽 절반이 유리로 된 곳이었는데, 갑자기 부장님이 포복을 낮추시고 속삭이신다. 우리 둘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 귀를 쫑긋 기울였다.


“리처드, 오늘 아침은 먹었어?”


“네, 둘이 새벽 예배 다녀와서 간단하게 먹고 왔어요.”


“새벽부터 와이프 고단한데, 뭘 아침까지 챙겨 먹고 나와! 리처드, 오늘 둘이 같이 와서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신뢰가 가네. 그래서, 내가 사직서 처리 할 거야. 그리고, 와이프는 왜 데려 왔어? 지금 당장 혼자 올라가서 일 그만둔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와. 와이프는 밑에 카페테리아 내려가서 기도하고”


남편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일 그만둔다고 상사에게 말하러 올라갔다.


인사부장님이 나를 보고 지긋이 웃어 주신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없지만, 역으로 보면 사방 천지에 널린 모든 것들을 우리 빈 손에 담을 수 있다.


야호!


마흔 즈음에 1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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