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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forme 5시간전

암환자가 된 후 나를 보는 시선들

인간관계의 허무함

남의 이야기로만 알았던 암환자.... 내 타이틀이 되었다. 내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은 숨길 일도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고 평소 소통하던 SNS로 치료 중이라고 알렸다.


그냥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다. 암을 치료하는 기간 동안 혼자인 것이 싫었다.


작년은  가족 모두가 힘든 해였다. 그런 와중에 나까지...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엄마였다. 엄마도 아픈 데가 많다 보니  힘든데 내 걱정까지 하게 생겨서 수심이 가득해졌다. 가끔 혼자 울고 또 함께 울고 우는 날이 많아졌다.


신랑은 한창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바쁘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암에 걸려버렸다. 얼굴이 어두워져 버렸다.


아이들은 엄마가 아프다고 하니 처음에는 감기처럼 생각했다. 천성이 밝고 웃는 아이들이라 엄마가 많이 아프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항암을 시작하고 머리가 다 빠졌을 때 첫째가 학교에서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필 엄마가 아파서  항암을 하다가 결국 하늘나라에 가는 이야기책의 작가님이었다.  작가님은  아이들에게 엄마가 많이 아픈 적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했는데 아이가 손을 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친구들이 물어볼 거 같아서 그랬다고...  그때쯤부터 엄마가 큰 병이라는 걸 알게  것 같다.


 엄마가 항암을 하고 가발을 쓰고 아파하는걸 책 속에서 읽게 된 첫째는 갑자기 철이 들어버렸다. 책 속의 엄마와 내가 겪는 아픔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는 엄마의 병이  감기 수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여전히 밝아서 다행이다.


오랫동안 카톡으로만 연락 가끔 하던 친구들... 항상 만나자고 말은 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도 연락이 왔다. 이렇게 보지 못했어도 아프다는 소식에 달려와 주는 친구도 있고 요즘 금값이라는 사과를 한 박스나  보내주는 친구도 있다.  10년 20년 보지 못했어도 옛정으로 이렇게 연락이 오니 너무 고마웠다. 그래도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매일 보거나 매일 연락하던 사람들의 태도가 결국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첫째의 친구 엄마...

아이를 통해 친해진 그녀는 3년이나 자주 통화하고 아이들과 함께 놀며 엄마들끼리 술자리도 자주 했지만  내가 암이라고 얘기를 전한 게 마지막이 되었다. 거의 매일 퇴근 때 통화하며 직장맘으로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해 주며 보낸 3년의 시간이 허무할 만큼  관계는 끊어졌다. 정작 내가 힘들 때는 모른 척한 것이다.


수술을 하고  입원을  해서  치료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딱 한번 문자로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길래 나도 섭섭하다고 전했다. 그게 마지막이다. 길건너에 살아서 어디서 마주칠지도 모르는 그녀인데 말이다.


  몇 달이 지나 나 없는 술자리에서 다른 엄마가 그녀한테 왜 나한테 연락을 안 하냐고, 내가 섭섭해한다고 전해주었는데 자기도 미안한데 시기를 놓쳐서 연락을 못하고 있다고 했단다.


 그녀가 얘기한 변명은 이렇다. 내가 아프다고 했을 때쯤  아파트 친한 엄마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으로 힘들어하고 있었고 나도 그렇게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연락을 못했다고 했다.  그 어떤 이유라도 난 이해도 안 되고 너무 섭섭했다. 지금 일 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아프고 나니 인간관계의 허무함이 더욱 선명해졌다.


회사...

6년간을  매일 보다시피 한 사장님... 생각지도 못한  나의 암투병은 회사에  큰 영향을 끼쳐버렸다. 작은 회사라서  날 대신할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고 수술하고 2주면 출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방암 1기에 항암까지  확정되면서 출근도 불투명해졌다. 원래는 3주 정도 쉬고 명절 지나면서 출근을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재택근무를 했다. 퇴원하고 집에 오자마자 일이 시작된 것이다. 최소한의 일만 하면서 하루하루 견뎠다.  


퇴원 후 항암을 바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항암을 하게 되면 힘들다는데 겪어보지 못해서 출퇴근하며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3주마다 하는 항암을 하게 되면 항암 하는 주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해야 할 거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때까지도 난 나갈 수 있으면 일을 하면서 치료받을 생각이었다.

매일 가야 하는 방사선도 출근하면서 할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일을 하며 병원을  다녀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사장님은 전화로 갑자기 언제부터 나올 수 있겠냐며 작은 회사에서 2주 병가도 크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재택근무는 회사가 봐줄 수 없다고 그러면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딱 잘라서 이제 수술하고 퇴원한 나한테 말씀하셨다. 그때 깨달았다. 작은 회사라 내 집처럼 생각하며 가족처럼 대해 오던 관계도 결국 의미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난 이렇게 얘기했다.

" 그러면 사장님이 결정해 주세요. 저는 재택근무 아니면 지금은 나가기 힘들 거 같아요. "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는 울었다. 갑자기 회사도 그만두게 되는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암이라는 타이틀 하나로 나의 일상이 다 무너져버렸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사장님도 대책이 없으셨는지 2시간 후 전화와서는 일단 명절 지나고 주 더 쉬고 출근하라고 했다. 일단 항암 하면서 출퇴근해보자고..... 하지만 그 이후로 난 어떻게든 회사를 다니려는 마음이 없어져버렸다. 될 대로 돼라!!!!  결국 항암을 시작하자마자 회사에서 너무 힘들어서 조퇴를 했는데 응급실을 통해 입원을 하게 되면서 항암이 끝날 때까지 재택근무가 되어 버렸다. 난 항암으로 누워만 있으면서도 아프면서도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야 했다. 진정한 쉼은 없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많이 쉬었다고 생각하셨다.

 


큰일이 생겼을 때 그들의 태도에서 지금까지의 친절함과 따뜻함이 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달았다. 관계에 연연하지 말알야겠다는 다짐이 생겨 버렸다.



그리고 정말 가장 큰 상처를 준 말은......

시어머니의 전화였다. 암이라는 소리를 듣고 걸려온 전화에서 울며 걱정을 해주는 것 같더니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던졌다.


" 너 암이면 애들도 나중에 유방암 걸리는 거 아니야? "

난 어이가 없었다.

" 아니에요 유전은 5% 밖에 안된데요."

" 그래도 너 유방암이면 애들한테도 영향이 있는 거 아니냐?"


남도 쉽게 못 물어볼 말을 생각 없이 던지고 있다. 그래 한 번이면 걱정돼서 그러려니 여기겠다.

그 이후 항암 중에도 전화로 또 물어보는 것이다.


" 근데 애들도 나중에 유방암 걸리면 어떡하냐"

" 유전은 5% 밖에 안된데요..."

" 너네 아빠도 암이고 친척들도 다 암으로 돌아가셨다던데 너도 암이니까 유전일 수도 있지!"


진짜 애들이 걸리기라도 바라는 건가??  그 어떤 누구도 쉽게 물어보지 못할 말을 저렇게 하다니.

저 두 번의 물음에 난 정말 너무 가슴이 아프고 내가  애들한테 죄인이 된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처음 항암 전 혈액종양내과를 방문했을 때 선생님이 젤리나 졸리 얘기를 하며 요즘은 유전으로 나오면 난소절제에 유방 모두 절제를 한다고 하면서 브라카 검사를 통해 유전이 되는지 알아보자고 했었는데 정말 유전이면 항암도 힘든데 견디기 힘들 것 같아 검사를 안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두 번의 물음에 너무 화가 나서 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졌다. 난 브라카 검사를 하기로 했고 한 달 뒤 유전이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막 던진 말들의 대가를 받고 있는 그녀.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는 그녀....


암이라는 타이틀은 나의 인간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진짜 보석 같은 사람들과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극명하게 알려주었다. 사람에게 기대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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