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에서 20살이 되었을 때, 마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고 들어온 것 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1월 1일, 나와 내 친구들은 당당하게 주민등록증을 들고 그때 당시 한창 유행하던 번화가의 막걸릿집에 갔다.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얼마나 뿌듯하고 신기했는지 모른다. 이후 1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일이 종종 있는데 (서구 문화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동양인의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이런 일이 꽤 있다.) 그 날의 기분은 다신 느낄 수 없었고 되려 귀찮기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교 대학교를 가는 일은 중학교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 다른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야간 자율학습을 제치고 생과일 전문점에서 파르페와 빙수를 먹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버스도 끊기고 택시는 야간 할증으로 비싸니 더 마시고 놀다가 첫 차를 타고 집에 가자'며 20대의 젊음과 자유를 만끽했다. (비록 잠이 많고 술이 약해서 이런 적은 손에 꼽지만...)
29살에서 30살이 되었을 때는 생각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저 '나는 여전히 스무 살 초반인 것 같은데 벌써 서른이라니''딱히 한 것도 없는데 앞자리가 바뀌었다니''엄마가 지금 내 나이에 학부모가 되었다니' 같은 충격만 가득할 뿐 다른 세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사실은 나도 모르게 다른 세계로 들어왔음을 친구들,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언니들과 대화하며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함께 수개월을 같이 일하고도 동료가 몇 살인지 모르는' 문화에 살고 있어서 더 늦게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남자 친구가 있는 친구들은 결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결혼했다더라, 아기를 낳았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남자 친구가 없는 친구들은 확실히 예전보다 이성을 만나기가 어려워졌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가벼운 소개팅 자리라고 해도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지금 나이에 만나다 보면 결혼까지 갈 확률이 크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상대를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본인보다 조건이 안 좋은 남자는 싫은데 그렇다고 조건이 더 좋은 남자는 그만큼 여자에게 요구하는 게 많았고, '내가 얼마까지 맞춰 주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다 보면 만남은 흐지부지 되기 일쑤였다. 이미 혼자서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굳이 남자를 만나서 많은 것을 조율하고 맞춰 가야 하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만남이 부담스럽기만 한 내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결혼을 반쯤 포기한 상태가 되었다.
반대로 결혼 생각이 전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만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해서 아무나 만나서 진지하지 않은 관계를 갖겠다는 것이 아닌데, 내 나이와 비슷한 이성들은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아예 가벼운 마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내 친구들도, 나도 정말 인연인 사람을 만나면 달라질까?
앞자리가 바뀌니까 같은 환경에서 마치 다른 인생을 사는 것 마냥 행동반경이 줄어든 느낌이 든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주변에 새로운 사람이 없고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모임이나 활동을 하기에는 귀찮기도 하고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가 별로 없다. 주변에 결혼 한 친구들이나 언니들, 심지어 동생들을 보며 '저런 삶은 어떨까?''안정적인 삶은 어떤 느낌일까?' 하고 간혹 궁금하긴 하지만 내가 그 세계로 들어갈 자신은 눈곱만큼도 없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서 살지만 사실은 각자가 선택한 데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30대가 된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할 수가 없다. 20대의 십 년이 금방 지나간 것처럼 30대 또한 그럴 것이 아닌가. 방황하고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 30대는 충분히 어린 나이는 아니기에 그만큼의 용기와 신념이 필요하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앞자리가 3으로 바뀌었지만 앞자리 4는 철저하게 준비해서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