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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Nov 30. 2020

한국인의 조건

몇 주 전, 내가 사는 건물에 잠시 지내게 된 한 친구를 만났다. 생김새는 동양인이었지만 미국에서 왔다고 하고 이름도 영문 이름이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대화를 시작했는데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친척이 한국에 있고, 부모님이 한국에서 사셨을 때 어땠다더라 하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속으로 그냥 '아 부모님이 한국분들 이신가 보다' 하고 말았다.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면 되는데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대화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고, 너무 캐묻고 알려고 하는 게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자제한 이유도 있었다. 무튼 나중에 그 친구를 소개해 준 친구로부터 그녀가 사실 한국어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다음에 만났을 때 물어보니 갑자기 유창한 한국어로 '아 저 한국어, 말은 잘해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때까지 오히려 영어를 못 했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살짝 속은 기분까지 들었지만 애초에 시작을 영어로 해서인지 아직도 그녀와 난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어제 프랑스인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서 그가 데리고 온 그의 친구를 만났는데, 생김새는 동양인이었지만 미국에서 왔다고 하고 이름도 영문 이름이었다. 반갑다 인사하고 말았는데 대뜸 자기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며 내게 한국 이름도 가르쳐 주었다. 내친김에 한국어는 어느 정도 하냐고 물어봤더니 전혀 못 한다는 게 아닌가.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몇 주 전 만난 그 친구 이야기가 나왔다. 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둘이나 만나게 되니 나도 모르게 신이 났었나 보다. 대부분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한국어를 잘한다는 그의 말 끝에 "응. 너 빼고"라고 말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부모님 두 분 다 한국말을 못 하신다며 어머니는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되셨다고 했다. 사실 나는 웃기고 싶은 욕구가 넘치는 사람이고, 대화하며 장난으로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의 대답 때문에, 그가 한국어를 못 하는 이유 때문에 집에 돌아와 내가 너무 무례했던 게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와의 대화는 나에게 몇 년 전 뉴욕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혼자 처음으로 뉴욕을 갔던 2015년 봄이었다. 내가 갔던 파티에 유일한 동양인은 나와 어떤 남자애뿐이었고, 그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자 그의 친구가 옆에서 '얘 한국인이야'라고 말했다. 아니 내가 토종(?) 한국인인데 한국인을 못 알아볼 리가. 그는 한국인이라기보다 조금 일본인스러운 스타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당연히 그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믿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에게 '그럼 한국어 해봐'라고 했는데 갑자기 그가 '나는 어릴 때 스웨덴으로 입양돼서 스웨덴 부모님 밑에서 컸어. 그래서 한국어를 못 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바로 그에게 사과를 했다. 나는 정말 네가 장난치는 건 줄 알았다. 그런 건 줄 몰랐다. 미안하다. 좌불안석이 된 나와는 달리 그는 굉장히 쿨 했다. 


몇 년 후, 그가 그의 여동생과 한국에 놀러 왔을 때 나 역시 마침 한국에 있어 만나게 되었다. 그의 여동생 또한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님이 입양해서 키워주셨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정말 좋았고 다행히 그녀도 나를 좋아해 줘서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다음 해에 내가 2주 일정으로 각 도시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유럽에 갔을 때, 나와 함께 여행하기 위해 파리로 와 주었고 우리는 파리 여행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함께 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누가 물어볼 때마다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대한민국의 여권이 있어야 한국인일까. 한국어를 하고 한국 특유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해야 한국인일까. 아니면 내 친구들처럼 한국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으면 한국인일까. 2020년 현재 대한민국 영토 밖에서 살고 있는 한국계 사람들은 8억 3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이 한국계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는 오지랖을 부리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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