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를 수정하며 몇 개의 경력을 지웠다. 같은 기간 중 두 군데에서 일한 경우 하나만 선택했고, 기간이 너무 짧거나 지원하려는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경력들은 지웠다. 한국에서의 아르바이트 경험은 다 지웠다. 그러고 보니 문득 '내가 어디 어디에서 일했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안 해본 일 빼고 다 해본 알바의 여왕 아니던가. 부모님 세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직장에서 평생 일했다는데 3년이 최고로 오래 일한 경력인 나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일이다. 무튼 그래서 정리해보는 나의 '돈 받은 활동'.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알바. 어릴 적 엄마 흰머리 개당 50원에 빼주는 거 빼고 처음으로 생판 모르는 남에게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받았음. 치킨집이었던 것으로 기억. 초등학교 6학년때의 일임. 아파트 경비 아저씨한테 걸린 적도 있음. 3-4번 정도 하다가 친구들이 전단지를 몰래 버리고 대충 시간 때우고 가게에 가서 돈을 받는 걸 보고 충격받아 이후로 다신 하지 않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뿌리고 돈을 받는 건 바보 같고, 전단지 버리고 돈을 받는 건 못된 애니까...
20살 때. 지금은 없어진 가게에서 일을 시작함. 본사에서 염탐(?) 나온 직원의 후기에 매우 친절하고 상냥한 아르바이트생으로 기록됨. 시간이 지나 더 이상 판매하지 못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가져오는 재미가 쏠쏠했음. 그때 당시 로즈버드라는 카페에 자주 가서 카페모카를 사 먹었는데 그 케일을 거기 사장님께도 나눠 드렸던 기억이 있음. 재수 준비 한다고 그만둠.
정식 알바는 아님. 큰외삼촌이 횟집을 오픈하고, 엄마가 매일 출근해서 주말에 가서 엄마를 도와줌. 곁들이찬 많은 거.. 손님일 땐 좋았는데 서빙할 땐 힘들었음.
20살 때 인가? 역시나 지금은 없어진 가게. 이자카야다 보니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게 힘들었고, 매니저 아저씨가 추파 보내서 한 달 만에 그만둠. 면접 볼 때 물 먹은 유리컵은 물로만 씻어도 되고, 뭐도 대충 해도 되고, 일도 편할 거고 어쩌고 하더니 내가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하고 점점 표정이 굳어지자 갈구기 시작함. 남자 아르바이트생들 담배 피운다고 정기적으로 화장실 가서 안 오고 매니저도 담배 피우는 거는 괜찮다길래 나도 걔네가 담배 피우러 가는 만큼 화장실 가서 앉아 있다가 옴. 아무리 한 달이어도 아무와도 안 친해짐. 진짜 그지 같았음.
알바 사이트에서 우연히 찾은 과외 알바. 중학생 남자아이의 음악 수행평가 준비를 도와주는 알바고 시간당 3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 일주일에 한 번씩 두 달 정도 했던 기억. 생뚱맞게 앞집 초인종 눌러서 학생이 찾으러 나온 적이 있음. 무슨 정신으로 살았던 걸까?
엄마가 횟집 옆에 있는 호프집을 두세 달 운영하고 수익을 챙기기로 호프집 사장님과 약속하면서 내가 매일 함께 가서 도움. 서빙 아르바이트생이 있었고 나는 주로 주방에 있었음. 워낙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 재밌었음. 엄마에게 얼마를 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 성격상 안 받았을 리는 없음.
결국 알바 사이트에서 피아노 강사 구인글을 보게 됨. 왜 전공을 살리지 않고 알바만 했나 후회됨. 면접 때 원장이 제시한 월급이 알바보다 나아서 일 시작. 월 70만 원으로 시작 6개월마다 5만 원씩 올려줬는데 그때는 최저시급보단 나으니까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업계 평균이 90만 원 정도였음. 11시 반부터 6시까지 근무였지만 일주일에 두 번 10시에 유치원 특강이 있었고 6시에 유치원 차량에 탑승해 하원지도 까지 하니까 다른 피아노학원보다 일이 많았음. 2년 근무 후 그만두고 친구와 일본으로 생애 첫 배낭여행을 감.
여행에서 돌아와서 좀 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바로 다른 일을 구하게 됨. 2년 전부터 시작한 적금으로 목돈 만들기 재미에 푹 빠져서 매달 들어오는 월급이 필요했음. 태권도와 같이 있는 학원이라 남자애들이 많았고, 전에 일했던 유치원에 비해 고학년들이 많았음. 고학년과 전공 학생 레슨을 담당했던 선생님과 친해졌고 몇 년 후, 그분의 조언으로 캐나다행을 결정함. 지금도 연락하는 사이. 원장의 남편인 태권도 관장이 밤에 전화해서 안 받음. 알고 보니 친한 후배랑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는데 나 말고 다른 젊은 선생님들한테도 전화했다고 함. 착한 플루트 선생님은 하도 나오라고 난리를 쳐서 난감했다고 함. 나한테는 다음 날 학원에서 왜 전화 안 받았냐 어쩌고 저쩌고... 정말 같잖다 생각함.
11월 즈음에 일을 그만뒀는데 마침 그 전 유치원에 7세 반 담임 선생님이 임신으로 갑자기 일을 그만뒀고 마침 나랑 동갑인 유치원 선생님이 원장에게 내 얘기를 해줌. 2월 말에 졸업할 때까지 7세 반 임시 담임을 맡음. 가자마자 재롱잔치 준비로 아무 가르침. 걸스데이 노래와 오렌지 캐러멜 노래 두 곡 했었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는 게 힘들었음. 7세 반은 고흐반과 피카소반, 두 개가 있었는데 미술과 음악시간은 두 반을 합쳐서 다른 반 선생님이 미술지도를 하고 내가 음악지도를 할 수 있게 원장선생님이 배려해 줌. 왜냐면 내가 7세 애들보다 그림을 못 그리기 때문. 3시에 종일반이 아닌 정규반 친구들이 하원하면 나는 피아노학원으로 넘어가 초등학생들 수업을 함. 계속 일하게 될 줄 몰랐는데 갑자기 피아노 주임이 잘리면서 3월부터 내가 주임이 됨. 이후 캐나다에 가기 전까지 약 2년 정도 일함.
* 피아노 강사 근무 경력, 총 합 5년은 나중에 캐나다 영주권을 신청할 때 경력을 인정받아 캐나다에서 1년만 일하고 영주권을 따는 엄청난 행보의 발판이 됨.
캐나다로 워홀을 온 지 약 한 달 후 면접을 본 한식당에서 근무하게 됨. 그전에 몇몇 한국인 식당에서는 어학원을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용되지 않았음. 나와 영어로 대화를 해보던가. 영어를 꽤 하니까 어학원을 안 다니는 거라곤 생각 안 하나 봄. 초밥도 같이 파는 꽤 가격대가 있는 한식당이라 그만두고는 한 번 밖에 안 가봄. 개그맨 이경실 님의 딸이 이곳에서 일했었다고 해서 실제로 한 번 봤는데 사모님이 가게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초밥 롤을 주는 걸 보고 충격받았다가, 열심히 일하다 그만두고 한 번 찾아갔을 때 나도 같은 메뉴를 주셔서 만족해했던 기억이 있음. 풀타임 근무를 못하고 하루에 2-3번 일하다 보니 가져온 3천 불이 바닥나기 시작함. 캐나다까지 왔는데 한국인들과 일하는 것도 별로라서 다른 일을 구하고 그만둠.
지금은 없어진 유니언 역 지하에 위치한 투고 빵집. 전부터 일하고 있던 한국인 두 명이 친절하게 잘해줌. 언니 한 명의 영어 이름도 그레이스였는데 그레이스 원투로 불렸던 기억. 출근시간에는 손님들이 굉장히 길게 줄을 서서 무척이나 바빴는데 6-7개 종류의 베이글에 토스트를 몇 번 하는지, 버터인지 크림치즈를 바르는지 기억할게 많아서 너무 힘들었음. 내가 이렇게 멍청했나 싶었는데 결국엔 적응함. 첫날 4시 반까지 출근하고 종종 새벽에 출근하다가 다행히 8시부터 4시까지 일하는 분이 그만두면서 매니저에게 잘 얘기해서 그분의 시프트를 받게 됨. 운이 좋았음. 계속 새벽부터 일해야 하는 거면 더 일찍 그만뒀을 것 같음.
우연히 만나 친해진 일본인 친구로부터 일을 추천받음. 토론토 옆 도시에 위치해서 출퇴근은 멀었지만 어떻게 잘 면접을 보고 채용됨. 첫 출근 날, 트레이닝을 같이 받은 친구와 아직까지도 친하게 지냄. 현재 이 친구의 집에서 임시로 머물고 있음. 이 일을 소개해 준 친구는 1-2번 같이 일하고 비자가 끝나 그만둠. 출근하면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큰 귀걸이를 착용하고 카지노 테이블 앞에 서서 큰 카드를 스캔하며 모니터에 나오는 글을 읽기만 하면 돼서 게임 룰을 몰라도 됐음. 2인 1조로 일하며 30분 일하고 30분 쉬는데 1시간에 15불을 받았음. 나는 조용한 밤 시프트를 선호해서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일했음. 끝나면 기차 타고 유니언 역으로 가서 베이커리로 출근한 적도 있고, 집에 너무 없으니까 집주인 언니가 내 짐이 있는지 확인까지 할 정도로 두 군데서 미친 듯이 일함.
워홀 비자가 끝나고 밴쿠버와 미국으로 한 달 동안 여행을 한 후 다시 토로토로 돌아옴. 일단 한국에 돌아가기 싫어서 6개월 관광비자를 받아놓음. 그 때문에 뉴욕에서 토론토로 들어오는 국경에서 이민관한테 심문당했고 버스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기다렸음. 기분이 나빴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한국에 가는 비행기표가 없었고, 일했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진짜 위험한 상황이었음. 안 들여보내줬어도 할 말 없는 상황. 무튼 토론토로 돌아와 백수로 살 수는 없었기에 한식당 면접을 2-3군데 봤는데, 이곳 면접 때 매니저로 있던 친구가 처음으로 나에게 물을 줌. 그 매너에 반해 일을 시작함. 중간에 사장님이 한국인 부부에서 중국인 부부로 바뀌었고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둠. 그래도 한 6개월은 일 했을까?
캐나다에서 컬리지를 다니기 시작함. 1학기인 첫 4개월은 일부러 일을 안 했고 슬슬 일을 구해야겠다 생각하던 중에 친구와 마이애미로 휴가를 감. 반찬이 많은 한식당에 비해 라멘 그릇만 가져다주면 되는 라멘집이 훨씬 쉽고 편하다길래 계속 라멘집 구직글을 기다리고 있던 중에 수영장 선배드에 누워 있다가 구인글을 발견함. 토론토에 있던 친구에게 부탁해 문자를 보내놔 달라 하고 토론토에 돌아오자마자 면접을 봄. 남자 사장님은 굉장히 깐깐할 것 같이 생기셨는데 좀 대화를 해 보니 못되거나 야박할 것 같지 않았음. 결과적으로 나의 촉은 맞았음. 학교를 다니면서 알바는 주 20시간만 할 수 있었기에 일주일에 이틀을 하루종일 일함.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라멘집 사장님에게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학교 끝날 때까지는 근무를 해달라고 부탁하심. 학교를 마치자마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고 싶었기에 구직활동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생각이었는데 사장님이 아시는 분이 유학원을 하신다며 학교 마칠 때쯤 소개해 주신다고 함. 사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지는 않았음. 기말고사 기간에 라멘집 사장님에게 연락이 와서 마침 유학원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이력서를 보내라고 하심. 덕분에 면접을 보고 채용이 됨. 한국행 비행기표를 이미 사놨기에 날짜만 한 달에서 2주로 조정하고 2주 후에 출근하기로 함. 이후 정확히 8개월을 일함. 같이 일하는 여자 동료들도 좋았고, 동생 같은 유학생들을 상담해 주는 일은 좋았으나 그 두 가지를 제외한 모든 게 별로였음. 열받은 어느 날 어학원 구인글에 이력서를 보냈고 연락이 옴. 나중에 룸메 동생에게 듣기론 이 기간 동안 내가 집에서 욕을 많이 했다고 함.
유학원 근무 중 화장실에 가서 전화로 인터뷰를 하고, 출근 전 면접을 봄. 폴란드 사람인 원장님은 한국인들과 일한 적도 있고, 한국인에 대한 기억이 좋은 사람이라 나를 좋게 평가해 줌. 유학생이었던 경험과 유학원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결국 채용됨. 나 빼고 모두 캐네디언이었고 심지어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다 보니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에 굉장한 부담감을 느낌. 친구들이랑 대화하고 학교를 다닐 때와는 전혀 달랐음. 일했던 직함은 정확히는 사무보조는 아니지만 했던 일은 사무보조라 그냥 그렇게 적음. 영주권을 신청할 때 즈음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이를 악 물고 참다가 영주권 나오자마자 정확히 1년 근무를 채우고 그만 둠.
유학원을 그만두기 직전, 유학원에 새로 오신 팀장님이 소개해 준 알바. 내가 한국에서 피아노 강사였다고 하자 아는 지인에게 나를 소개해주심. 초등학생 여자아이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유독 더 나를 좋아해 줘서 그런지 그 한 명만 기억나고 다른 친구는 기억이 안 남. 어학원에서 일하면서 매주 금요일 업타운 지역으로 올라가 과외함. 시간당 얼마를 받았는지 기억이 안 남. 역시나 한국 오게 되면서 그만 둠.
유학원 근무 중에 우연히 눈썹 연장 수업 글을 보게 되었고, 집에서 눈썹 연장을 하는 분에게 적지 않은 돈을 교육비로 지불하고 기술을 배움. 그분에게 재료도 사서 몇 번 수업을 받은 후, 마사지 베드를 사놓고 직접 손님을 받음. 내가 했던 모든 일 중에 가장 나의 성격과 맞지 않는 일이었음. 나중에는 친구의 아는 동생 한 명만 남았음. 역시나 한국 오게 되면서 그만 둠.
2019년 1월 한국으로 돌아가 병든 몸을 치료하고, 서울에서 식당을 오픈하고 싶다는 계획을 부모님에게 강력하게 피력함. 포케 식당 오픈을 위해 캐나다에 있는 포케집에서 일을 해보겠다며 여름에 다시 캐나다로 감. 아직 워킹 비자 기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어서 문제없이 입국함. 토론토에 입국하자마자 영주권 최종 승인 레터가 나옴. 밴쿠버로 넘어가 포케 일을 구함. 두 군데는 앞에서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아 포케를 만들어주고 계산을 하는 일이었고 한 군데가 주방이었음. 정식으로 주방에서 일했던 적은 없어서 신기하고 재밌었음. 약 4개월 근무하고 한국으로 돌아옴. 굉장히 목적이 다분한 알바였음.
캐나다에서 종종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며 향수병을 달래고 힐링을 했는데 이 글들을 엮어서 책으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 꽤 많은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는데 한 출판사에서 나에게 인세가 없는 계약을 제안했고 네이버 작가 카페에 질문을 함. 그 글을 본 출판사 대표님이 쪽지를 보내주시며 쓴 글을 한 번 읽어보자 하셨으나 몇 달 동안 연락이 없으심. 마침 한국에 갔을 때 다시 연락이 왔고 미팅을 하게 됨. 원래 출판사의 계획은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에서 유학을 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내는 거라 출판사에서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심. 한 달 동안 열심히 써서 원고를 넘겼는데 이후 내 글을 단독으로 출판하는 것으로 결정됨. 시리즈의 1편이랄까. 하필 코로나가 터져서 판매 성적이 좋지는 않았음. 그래도 내 이름이 적힌 책이 교보문고에 깔리고,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 게 정말 많이 신기하고 행복했음.
우여곡절 끝에 2020년 4월 이대 앞에 가게를 오픈함. 부동산 계약 후 코로나가 터지고 건물 경매 사실을 알게 되는 등 시작부터 쉽지 않았음. 막내 삼촌의 친구에게 도움을 받아 비싸지도 싸지도 않는 금액으로 인테리어를 함. 초반에는 평일에 거의 매일 엄마가 와서 도와줬고 나도 쉬는 날 없이 일하다가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하루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기고 쉬었음. 배달이 꽤 잘 돼 21년 봄, 강남에 2호점을 오픈했다가 1년 후 권리금을 받고 가게를 정리함. 이후 22년 12월에 이대 가게도 정리함.
작가 교육원을 마치고 보조작가로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듦. 작가 카페에서 구인글을 보고 면접을 봄. 총 세 군데 면접을 봤는데 두 군데는 채용이 안 됐고 마지막은 면접 중에 작가님이 같이 일해보자고 하심. 갑자기 너무 당황스러워서 건방지게 '생각해보고 연락드리겠다'라고 함. 나중에 작가님은 이런 나의 당돌함이 오히려 좋았다고 하심. 엄마가 역삼점을 봐주고 있었는데 마침 역삼점을 정리하고 한 달이 지난 후라 엄마에게 부탁을 함. 나를 대신할 풀타임 직원을 구해 엄마가 트레이닝을 했음. 작품은 이미 6부까지 나온 상황에 중간에 투입된 경우라 초반에 열심히 적응하려고 노력함. 처음엔 상암에 내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받다니. 물론 힘든 부분도, 스트레스받는 부분도 많았지만 정말 뜻깊고 좋은 경험이었음. 이후에 다른 제작사에서 잠깐 보조작가 일을 했지만 이미 편성이 끝난 그 전 작품과 달리 계속 편성이 안되면서 근무 기간이 하염없이 길어짐.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는 결정을 하면서 어차피 끝까지 일을 한 게 아니면 경력으로 쓰지도 못하니까 그냥 바로 그만 둠.
그리고 다시 돌아온 캐나다에서 슬슬 일을 구하려고 준비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