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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Sep 17. 2022

나는 살아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본가로 가는 광역 버스에 올라탔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본가를 가려면 무조건 지하철을 타야 하지만 마침 바리스타 수업이 강남에서 끝나고, 그다음 날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도 되는 일정이라 강남에서 본가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 (심지어 지하철보다 빠르다)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밤 10시에 좌석이 두 개씩 붙어 있는 광역버스에 올라타니 마치 시외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여행 가는 기분이 들어 조금 설렜다. 어쩌면 집에 가서 엄마랑 치맥을 하기로 해서 설렌 건지도 모른다.


일행도, 이어폰도 없는 나는 혼자 멍하니 앉아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불빛은 제자리에 있어 지나갔고, 어떤 불빛은 움직이는데도 지나갔다. 

어떤 불빛은 은은한 노란색이었고, 또 어떤 불빛은 열정적인 빨간색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아, 나 지금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생각해보니 벌써 10년이 넘었던 것이다. 내가 너무 너무 너무 죽고 싶었을 때가. 

너무 살기 싫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그때는 버스에 앉아 있다가 버스가 빠른 속도로 고속도로를 진입할 때면 이대로 버스가 폭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꽉 채우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살기 싫다', '죽고 싶다'를 넘어서 '당장 죽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 죽지 않고 살았다. 

미친 듯이 살기 싫었던 그때의 나도, 

몇 년 후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에서 '예전의 나는 죽은 거다'라며 굳게 다짐했던 나도,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이게 맞는 삶인가' 싶어 이 악물고 버티는 삶을 살았던 나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돼!'라는 강박에 하루도 쉬지 않고 나 자신을 돌리는 나도, 

살았다. 


죽지 않으려고, 내가 예상했던 삶이 아닌 삶을 사는 것을 만회하려고, 

나는 실패자고 굳이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악착같이 이 악물며 살았다. 


 




마치 이중인격자가 된 것 마냥 그때의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서 살아보니 지난 10여 년이 어땠어?"


캐나다에서 처음 느껴보는 관심과 인기에 정신 못 차리고 놀던 핵인싸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 책을 출판하고, 가게를 오픈한 내가, 

아빠의 황당한 우스갯소리에 배를 잡고 웃던 내가, 

엄마를 보며 내 엄마지만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던 내가, 

오래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던 내가, 

한국에서 사귄 외국인 친구들과 매주 홍대 클럽에서 춤추며 흥이 넘치던 내가, 

대답했다.

"그래도 살아보니 나쁘진 않았던 것 같아"


이 나이가 먹고서야 그 유명한 찰리 채플린의 명언의 뜻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지나고 보니 신기하게도 좋았던 기억만 남는구나.

10년 후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내가 지금 10년 전의 나에게 '그래도 살아서 좋았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처럼 10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그때 이후 10년이 진짜 대박이었어!'라고 말해줄 수 있기를...


이런 기대감에 젖으며,

나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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