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Top10
최근 일본 드라마를 몇 편 보고 꽤 놀랐다. 이러다가 세계의 관심이, 한국 드라마를 사랑하는 해외 팬들이 관심이 일본으로 분산되진 않을까 걱정되는 오지랖 섞인 마음도 살짝 들었다. 흔히 옆나라 일본의 드라마를 생각하면 심하게 과장하고, 손발 오글거리게 하고, 유치하고, 촌스럽고, 피식 코웃음 치게 하는 부분이 꽤 많았다고 생각한다. 몇몇 장면들은 인터넷에서 밈으로 돌면서 한국 네티즌들의 웃음버튼으로 장르물은 그런 부분이 덜 했지만 총 에피소드 10개로 구성된 드라마들은 어느새 너무 똑같은 패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몇 개의 일본 드라마를 재밌게 봤고, 앞서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일본 드라마를 안 좋아하거나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일드 10개를 정해봤다.
1.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일본 유명 연예인이자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 '호시노 겐'의 팬인 친한 친구로부터 꼭 보라는 말을 듣고도 한 동안 보지 않았다가, 정말 우연히 보기 시작한 드라마. 처음에는 친구에게 '도대체 이 남자가 뭐가 잘생겨서 유명한 거냐. 주인공 치고 너무 별로인 거 아니냐'라고 비하 발언을 쏟아내다가 중반부엔 '보다 보니 괜찮은 것 같다. 나름 매력 있네.'라며 조금 호의적으로 바뀌었다가, 후반부엔 '너무 멋있어!!!! 나도 이런 남자!!!!' 울부짖게 만든 마성의 매력을 가진 '호시노 겐'과 실제로 결혼해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 이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을 연기한 '아라가키 유이'의 '합'이 잘 느껴지는 드라마. 계약 연애, 계약 결혼 뻔한 소재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푸는 과정에서 보이는 작가의 가치관이 좋았다. 이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은 딱히 직업 없이 살림만 하지만 직업의식을 갖고 일하며, 언제나 당당하다. 이후 스페셜 편에선 갓난아기의 육아에 대해 다루는데 '남녀평등 사회에서 건강한 부부 관계란 이래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 MIU404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를 재밌게 본 후, 친구가 '호시노 겐'의 다른 작품을 추천해 줘서 봤다.
이 작품 역시 또 다른 주인공 '아야노 고'와의 합이 좋은 작품. 내가 이 작품을 탑 10에 뽑은 이유는 베트남 이민자들과 관련된 에피소드 때문이다. 드라마는 일본에서 언어를 배우고, 일본인들이 싫어하는 궂은일을 하며 살고 있는 동남아 이민자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저지른 것으로 생각됐던 범죄가 사실은 그들이 아님을 밝히면서 시청자의 선입견을 부쉈다. 오히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 캐릭터가 일본 내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어려운 환경을 언급하며 시청자들에게 이민자 문제를 각성시켰다. 이런 문제의식과 자아비판을 가진 작가라니!
3. 언내추럴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와 'MIU404'의 작가가 동일 인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 크게 놀랐다. 어쩐지... 작가의 깨어 있는 문제의식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닌 스토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내서 좋았다. 해서 일부러 찾아본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제목 그대로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에 대해 조사하는 이야기다. 최근에 이 '언내추럴'과 'MIU404'의 세계관을 통합한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했다고 들었다. 언젠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4. VIVANT (비반트, 비방)
함께 사는 일본인 룸메이트가 어느 날 갑자기 이 드라마를 추천해 줘서 보기 시작했다. 사실 이 드라마는 평점이 높지도, 탄탄한 구성의 매우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치밀한 구성과 미친 반전의 드라마들을 생각해 보면 그에 미치지는 못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Top10에 꼽은 이유는 내가 이 드라마를 보고 이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1부부터 해외 로케가 나온다. 주인공은 꽤 좋은 영어 발음으로 영어를 쓰기도 하며, 주인공의 친구로 CIA 요원도 잠깐 나온다. 총도 쏘고 폭탄도 터진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스케일이 크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일본 드라마는 무조건 일본에서만 촬영하고, 주인공의 영어 발음은 최악이며, 심지어 외국인 역할도 일본 배우가 연기하곤 했다. 지나치게 '가내수공업'느낌이 들어 철저한 '내수용' 드라마였고, 이를 보는 외국인들이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 같았지만 이 드라마는 다르다. 넷플릭스용, 해외수출용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사카이 마사토'의 연기가 미쳤다. 나는 이 드라마를 통해 이 배우를 처음 봤는데 '수리남'에서의 조우진 배우를 떠올리게 했다. 뭔 소린지는 두 드라마를 모두 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5. 그랑 메종 도쿄
요즘 워낙 '흑백요리사'가 대세라서 덕분에 이 드라마가 자주 언급 되길래 보기 시작했다. 기무라 타쿠야는 내적 친밀감이 엄청 나 그냥 일본에서 열심히 사시는 먼 친척 삼촌 같다고 하면 공감하는 사람이 꽤 있으려나. 웃긴 건 이 불어 제목을 영어식으로 '그란데... 메이슨... 도쿄?'라고 읽어 친구가 '뭘 본다고? 그게 뭐야..' 했다는 것. 이름이 어쨌든 내용은 조금 뻔하긴 하다. 천재적인 셰프가 큰 사고를 치고 몇 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다가 주인공을 만나 함께 일본에서 프랑스 고급 레스토랑을 오픈, 미슐랭 스타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이 뻔한 소재와 플롯을,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매력 있는 '김탁구'와 먹을 순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는 것 같은 맛있는 음식들이 보완해 준다. '작가는 이 요리 소재와 에피소드들을 어떻게 찾고, 줄거리로 녹여냈을까'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6. 아리스 인 보더랜드
보통은 콘셉트가 좋고, 초반에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큼 임팩트가 있고, 잘 풀어나가는 드라마들은 결말이 매우 허접하다. 작가가 수많은 미끼를 던져놓고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드라마 역시 보는 내내 '아... 열린 결말로 끝날 것 같다.'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달랐다. 결말이 오히려 가장 좋았고, 이 결말 때문에 나는 '오징어 게임'보다 이 드라마에 더 좋은 별점을 줬다. 죽고 죽이는 잔혹함이 싫거나 그 긴장감이 싫거나, 또는 시리즈가 너무 길어서 보기 싫으면 유튜브 요약본이라도 추천한다. 진짜 꼭 봐야 할 작품!
7. Anti-Hero
유일하게 몰아보기 정주행을 하지 않고 두 번에 나눠 공개될 때마다 챙겨 본 작품. 물론 후반부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보지 않고 기다렸겠지만 그 기다림이 가치가 충분했을 만큼 재밌었다.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면 일본의 형사 재판 유죄율이 99.9% 라는 미친 현실을 몰랐을 것이다. 처음부터 변호사인 주인공은 '선'하고 검사들은 '악'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입변호사인 또 다른 캐릭터를 통해 끊임없이 주인공의 의도와 과거를 의심하게 만든다. 10화까지의 구성도 좋고, 주인공 배우의 연기도 좋다.
8. 도쿄 사기꾼들
이 드라마는 선악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작품이다. 제목이 사기꾼들인 만큼 우리나라 영화 '도둑들'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통쾌한 드라마는 아니다. 처음부터 많은 희생자와 이들을 잡으려는 형사의 얘기가 많이 나온다. 이 사기꾼들을 응원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게 만드는데 'MIU404'에서도 본 '아야노 고'가 연기한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로 굉장히 이중적인 인물이자 혼란스러워하는 인물이다. 결말로 봐서는 시즌2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인데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진행 중인 건 아닌 것 같다.
9. 솔로 활동 여자의 추천
내가 꼽은 최고의 일본 드라마 10개 중 선정 이유가 가장 모호한 작품. 뚜렷한 스토리가 있는 게 아니라 에피소드 형식이다. 매 에피소드마다 결혼도, 연애도 안 한 솔로의 여주인공이 혼자 시간을 즐기는 내용이다. 놀랍도록 캐릭터도 적고, 내용도 없다. 혼자서 다니는 만큼 주인공의 속마음이 계속 내레이션으로 나온다. 잘 만든 유튜브 브이로그 같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스토리 강한, 구성 탄탄한 드라마보다도 중독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편을 보고 나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 끝까지 정주행을 했다. 무려 시즌 4까지 나왔다고 하니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 아닐는지.
10. 우주를 누비는 쏙독새 (Switched)
위의 9가지 작품 중 가장 먼저 본 일본 드라마. 못생기고 뚱뚱해서 인기 없는 주인공이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하고 학교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예쁘고 인기 많은 동급생과 영혼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영혼 체인지는 워낙 흔한 소재라 처음에는 아무 기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다가 점점 빠져 들었다. 뚱뚱하고 못 생긴 주인공의 몸을 갖게 된 친구가 특유의 활발한 성격으로 친구를 많이 사귀고, 일명 '인싸'가 되는 내용이 특히 좋았다. 나는 이 드라마가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자'는 강한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이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보면서 꽤 울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