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Top 10
며칠 째 몸이 좋지 않았다. 하루는 몸살이 너무 심하게 나서 집에 있던 키트로 코로나 검사까지 했지만 코로나는 아니었다. 좀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토요일 아침 눈을 뜨니 몸도 마음도 전혀 힘이 없었다. 바로 전날 밤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잠에 들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럴 수도 있는 것이다. 토요일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너무 누워 있어서 허리가 아플 정도였고, 그대로 밤에 또 잠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 8시에 일어나서 핸드폰을 좀 보다가 다시 잠들었다. 원래 우울하면 잠을 미친 듯이 잔다. 예전에는 금요일 밤에 자서 중간중간에 잠깐씩 일어났다가 금방 다시 잔 뒤 월요일 아침에 제대로 일어난 적도 있었다. 무튼 그렇게 일요일 2시가 되었고, 이렇게 주말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불을 박차고 나가야 했다. 내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무기력이라는 단단한 막을 깨고 나갈 때 했던 일들을 순서대로 적어본다.
1.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핸드폰이 없다고 상상해 보자. 정말 몇 시간씩 침대에서 누워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정말 무기력하고 머리가 멍한 상태라면 꽤 오랜 시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최대 몇 시간일까? 그런데 핸드폰과 함께라면 무적이 된다. 하루가 뭔가. 며칠도 핸드폰만 끼고 있을 수 있다. 핸드폰 속 세상은 언제나 즐겁고, 다이내믹하다. 그래서 더욱 멈출 수 없다. 하지만 무기력을 깨고 싶다면, 핸드폰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핸드폰을 끄고 내려놓고 가만히 천장을 보고 누워 있어 본다. 잠시 후, '일단 좀 일어나 볼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2. 샤워를 한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으므로 씻었을 리가 없다. 2-3일 정도 안 씻었다면 당연히 찝찝할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스스로 더 씻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더러운 내 몸에 벌레가 있는 걸 상상한다. 실제로 안 씻었기 때문에 이런 상상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럼 당연히 벌떡 일어나서 '일단 좀 씻자' 싶을 것이다. 침대를 벗어나서 움직인다? 놀라운 발전이다. 겨우 한 걸음이지만 아주 큰 한 걸음이다.
3. 샤워 후, 바로 새 외출복을 입는다.
2-3일을 안 씻었는데 옷을 갈아입었을 확률은? 0에 가깝다. 애초에 씻기 위해 옷을 벗을 때 바로 빨래통에 넣어 버린다. 설마 그걸 꺼내서 다시 입진 않겠지. 싸악- 깨끗하게 씻고 난 뒤에 한 번 입어서 안 빨고 넣어둔 청바지 이런 거 말고 빨고 나서 아직 한 번도 안 입은 새 옷을 꺼내 입는다. 청바지를 가장 추천한다. 외출복이어도 편한 트레이닝 복, 고무줄 바지 이런 걸 입으면 방 안에서 다시 퍼지는 건 마찬가지다.
4. 책상을 정리한다.
당신은 이제 깨끗하게 씻고, 새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리며 방으로 들어온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건? 어지러운 책상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2-3일을 무기력하게 보내고 나서도 책상이 깨끗할 확률? 0에 가깝다. 책상엔 높은 확률로 먹고 난 그릇이 있을 것이다. 2-3일 동안 굶은 건 아니니까. 보통은 포장용기, 컵라면, 휴지 등등이 널브러져 있다. 쓰레기틍올 들고 와 싹 버려 버린다. 그리고 다른 물건들도 제자리를 찾아 놓는다. 책상의 최소 80% 공간을 확보해서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 마치 내 머릿속을 정리한 것처럼.
5. 가능하면 세탁기도 돌린다.
샤워하기 전에 옷을 빨래통에 넣었던 것을 기억하는 가? 아마 높은 확률로 다른 옷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 깔끔하게 세탁기를 돌린다. 마치 머릿속의 묵은 것, 오래된 것, 더러운 것을 없애 버리는 것처럼 내 방을 머릿속처럼 만들어서 정리도 하고, 옷도 세탁을 한다. 보통 '집안일'을 말할 땐 빨래와 청소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놀랍게도 버튼 하나 누르는 것으로 집안일 하나를 한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가!
6. 맛있는 커피를 한 잔 먹는다.
난 커피를 좋아한다. 매일 최소 한 잔은 마신다. 오전에 안 마셨으면 오후에라도 마신다. 굳이 따지자면 그게 내 루틴이다. 하지만 무기력해서 한 없이 쳐져 있을 땐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굳이? 배고프니까 밥만 먹는다.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에도 밥은 먹는 게 참 대단하다. 어쨌든 집에서 커피를 내리거나 집 앞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 먹는 수고스러움을 굳이 한다. 커피를 한 모금 먹고 생각한다. '맞아. 평소엔 매일 이걸 마셨지.' 마치 커피를 마심으로 해서 잠시 이탈했던 내 하루가, 일상이 다시 트랙으로 돌아간 것 같이 느낀다.
7. 코미디 영화를 한 편 본다.
사실 무기력할 땐 웃을 힘도 없다. 아무것도 웃기지도 않을뿐더러 웃겨도 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코미디 영화를 본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땐 스토리를 어떻게 전개했는지, 어떤 식으로 갈등을 만들고 풀어 나가는지 많은 생각을 하면서 보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을 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코미디 영화는 스토리가 단순하다. 누구나 전개는 물론 결말도 예상 가능하다. 비극적이고 불행한 결말인 코미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무튼 액션이 가미된 코미디 영화를 한 편 틀어서 무표정으로 보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꽁꽁 언 것 같았던 내 마음도 조금 녹은 느낌이 든다. 물론 영화는 크게 웃기지 않을 수도 있다. 너무 뻔해서 '이게 뭐야...'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8. 스트레칭을 한다
이제 몸을 조금 움직여보자. 유튜브를 보고 따라 해도 좋고, 그냥 혼자 스트레칭을 해도 좋다. (실제로 여기까지 쓰고 스트레칭을 하고 왔다.) 일단 목부터 돌려본다. 그리고는 팔로 머리를 잡아 양쪽으로 누르며 목 옆을 늘려준다. 그리고는 양팔을 돌려 어깨를 움직인다. 이제 양팔을 뒤에서 잡고 가슴을 앞으로 내민다. 이 동작이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중요한 동작이다. 가슴을 여는 것. 이젠 두 팔을 머리 위에서 잡고 상체를 양 옆으로 반복해가며 숙여서 허리 양 옆을 늘린다. 여기까지 충분히 의자에 앉아서 할 수 있다. 앉은 채로 두 다리를 올려 두 발을 꺾었다가 밀었다가 (요가 발을 했다가 발레 발을 한다) 하고, 두 발을 돌려 발목을 스트레칭한다. 일어나서 제대로 스트레칭하는 건 아직 좀 무리다. 여기까지만 한다. 충분하다.
9. 향초, 와인잔, 재즈, 그리고 거품목욕
혹시 아직 씻지 않았다면?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코미디 영화를 한 편 본 후 앉아서 스트레칭까지 하고 났더니 조금 더 움직일 힘이 생겼다면? 그렇다면 욕조를 대충 청소하고 따뜻한 물을 받아보자. 향초를 켜서 불 꺼진 화장실에 은은하게 빛이 퍼지게 두고 (이럴 때는 강한 조명도 피곤하게 느껴진다.) 잔잔한 재즈 음악을 틀어 놓는다. 와인이 아니라 와인잔인 이유는 이럴 때 술을 마시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냥 기분만 내려는 거니까 와인잔에 얼음 2-3조각과 향이 좋은 탄산수를 넣어 마신다. 탄산음료가 아니라 탄산수면 더 좋다. 액상과당을 먹고 나서 의도치 않게 기분이 좋아졌다가 시간이 흐른 후 더 다운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을 안 움직여서 에너지 소비가 없는데 몸에 단 걸 때려 넣으면 죄책감이 들지 않겠는가. 집에 탄산수가 없다면 물, 무알콜 음료... 정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다면 뭐.. 제로 라도...
10. 어떻게든 나갈 이유를 만들어 나간다.
나가야만 하는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본다. 집 앞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산다거나 편의점에서 치약을 산다거나 조금 걸어서 서점에서 책을 구경한다거나 아니면 동네 친구에게 만나자고 한다. 씻고 이미 외출복으로 갈아입었으니 나가는 건 좀 쉽다. 화장 안 하고 만나도 되는 상대와 거리를 정해서 꾸미지 않고 그냥 나간다. 보통은 꾸밀 힘과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냥 집에 있는다. 하지만 안 꾸미고 나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가서 바람을 쐬고, 맑은 공기를 마신다. 살 게 없고 할 게 없으면 그냥 동네 한 바퀴라도 걷고 들어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