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좌충우돌 컬리지 적응기
드디어 첫 학기가 시작됐다. 시간표에 나와 있는 강의실은 영어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이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지만 물어 물어 잘 찾아갔고, 첫 학기라 그런지 전공과목보다는 Business 계열 공통 수업이 많아서 강의실마다 학생들이 많았다. 건물 1층 입구 앞에 앉아 있는 친절한 경비 아저씨로부터 처음 알파벳 두 개는 캠퍼스, 마지막 하나는 건물을 의미하고 숫자 앞자리는 층, 그 뒤는 교실의 번호임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들은 캐나다식 영어를 구사하는 분들 뿐만 아니라 인도식, 중국식 등... 다양한 악센트를 가진 분들이 많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100프로 전부 다 이해하진 못 했지만 크게 무리는 아니었다.
어느 날 백인 캐네디언 교수님의 전공 수업을 듣고 있는데 그분이 자꾸 '다라는 중요하다'며 자꾸 다라, 다라를 외쳤는데 나는 도대체 다라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대야를 다라라고 하는데', '산다라 박은 아닐 테고' 대체 다라가 뭘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마침 교수님이 마커를 들고 큰 보드에 글자를 적었다.
디. 에이. 티. 에이 그러고 바로 마커를 내려놓는다. 끝이야? 저게 다야? 데이터? 저거라고? 이렇게 쉬운 단어였다니.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 혼자 실소했다. 그리고 영어와 관련된 황당했던 그 일이 생각났다.
때는 바야흐로 고등학교 1학년 때. 야자를 하던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짝꿍이 갑자기 펜으로 톡톡 치더니 어떤 영어 단어의 뜻을 물었다. 나는 소위 '영어 좀 한다'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며칠 전 봤던 영어 듣기 평가 문제 중에 매우 까다로운 문제가 있었는데, 시험이 끝나자마자 우리 반에 들어온 본인이 명문대 출신임을 온 세상에 어필하던 콧대 높은 영어 선생님은 나와는 다른 답을 정답으로 예상했다. 나는 '선생님 답은 정답이 아닌 것 같다'며 자신 있게 '내 답이 맞다'라고 우기던, 영어에 관해서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학생이었다. (결국 교육청에서 발표한 정답은 내 답이 맞았다.) 무튼 나는 짝꿍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어야 할 것만 같은, 이유 없는 책임감을 느꼈는데 도통 뜻이 생각나지 않았다. 철자도 쉬운 그 단어는 'Resort'였는데, 짝꿍과 함께 '너 리솔트 뜻 알아?' 하며 반에 있는 온 친구들에게 물어봤지만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다 같이 사전을 찾기 시작했는데 모든 반 학생들이 모여 함께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그 광경을 선생님이 봤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단어의 뜻은 우리가 놀러 가면 묵는 리조트였고 그 허무함과 허탈함에 다 같이 어이없어 했었다.
한국에서도 많이 쓰는 단어인 데이터(Data)를 못 알아듣는 바람에 그 추억이 생각났다. 한 나라에서는 다양한 지방 사투리가 존재하는데 어느 지역인진 모르겠으나(어쩌면 토론토) 하여튼 그 교수님은 데이터를 '데이라'가 아닌 '다라'라고 했다.
발음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 차이 때문에도 이런 일은 자주 있었다. 다 함께 대기업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교수님이 휴렛 앤 페커드라는 회사 이름을 자꾸 얘기했는데 친구에게 슬쩍 '그게 뭐 하는 회사야?'라고 묻자 친구는 눈을 크게 뜨며 내게 '휴렛 앤 패커드를 모른다고? 장난하지 마!'라고 말했다. '장난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휴렛 앤 패커드(Hewlett-Packard)는 우리가 흔히 HP라고 부르는 회사였다. 컴퓨터로 유명한 세계적인 기업을 모른다고 했으니 마치 '삼성이 뭐냐'라고 묻는 것 같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로고에 HP라고 쓰여 있는데 이걸 왜 줄여 부르지 않는 것인지 화가 났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배스킨라빈스는 아무도 BR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베라'라고 하기도 한다)
마케팅 수업 중간고사엔 어떤 차종이 문제에 나왔는데 이 차가 소형차인지 SUV인지 같은 기본 정보가 있어야지만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이 문제는 버려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다른 문제들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내 옆에 앉은 중국인 아줌마가 손을 들고 이게 어떤 차냐고 묻는 게 아닌가. 교수는 친절하게 이 차가 어떤 차인지 특징을 설명해 주었고 그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나도 그 차가 무슨 차인지 몰랐는데 못 물어보고 있었다'라고 하자 그 아줌마는 '그레이쓰, 우리는 외국인이잖아. 이런 차는 모를 수도 있지. 그럴 땐 꼭 물어봐야 해'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래. 모른다고 주눅 들 필요는 없다. 모르면 당당하게 물어보면 된다. 왜냐, 우리는 국제학생으로서 엄청난 학비를 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