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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쓰 Apr 03. 2019

3-1 토론토로 돌아오다

3장. 좌충우돌 컬리지 적응기

두 달 동안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캐나다 토론토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신청한 학생비자도 공항에서 비자 레터로 잘 받아서 나왔다. 이제 나는 약 2년 동안 비자 걱정 없이 캐나다에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는데 하필이면 그날 눈폭풍이 몰아쳐서 도로에 차가 한 대도 없을 정도로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날씨였다. 기존에 살던 방을 11월과 12월 두 달 서블렛(단기간 동안 다른 사람이 돈을 내고 지내는 것. 월월세)을 주었기에 1월이 돼야 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5일 정도를 다른 친한 친구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는데 넓고 좋은 소파가 있어서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두 달 만에 다시 만난 친구들이 반가워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꺼내자 두 친구 모두 나보다 소주를 더 반기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낮에 나와 함께 지구 반 바퀴를 날아온 과일맛 소주를 맛보며 나의 무사귀환을 축하했다.

 

다시 돌아온 토론토는 놀랍도록 익숙했다. 1년 6개월을 살았던 곳이 아니라 최소 3년은 살았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문제는 두 달 동안 쓰지 않은 영어였는데 이렇게 금방 영어를 까먹을 줄 미처 몰랐었다. 친구에게 급하게 말할 때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말을 했고, 친구는 '너 지금 나한테 한국어로 말한 거야?'라고 되물었다. 말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문장이 꼬여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영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1년 전, 내가 길어야 1년 반 후에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자식 군대 보낸 셈 쳤던 부모님은 갑자기 하나뿐인 딸과 이별을 해야 했다. 졸업 후 영주권까지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므로 한국에 언제 다시 돌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덕분에 공항으로 배웅 온 엄마는 출국장에 들어가는 나를 보며 오열을 했고, 아빠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옆에 있던 사촌 동생까지 울어 결국 눈물바다가 되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출국장으로 들어갔지만 흐느껴 울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서도 민망할 만큼 자꾸 눈물이 흘렀다. '엄마라는 사람이 떠나는 자식 마음 편하게 억지로라도 웃으며 보내주고 울 거면 뒤에서나 울 것이지'라고 엄마를 원망할 만큼 이기적인 생각이 들면서도 가슴이 아픈 것은 여전했다. (나중에 사촌동생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이렇게 울고 바로 매운 닭발을 먹으러 갔다고 한다. 참나.) 


친구네 집에서 지내느라 짐을 풀지 못하니까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마다 큰 가방을 열었다 닫아야 했는데 한 번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욱하는 느낌이 들면서 '안 되겠다. 이 짐을 다시 싸서 한국에 돌아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미 낸 학비를 어떻게 환불받을 것인가'를 생각했는데 그 충돌적인 마음이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정확히 4일 동안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이곳에 있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다행히도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12월 31일 친구가 주최한 파티에 가서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춤도 추고, 자정에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는데 그게 그렇게 신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숙취와 함께 눈을 뜨자마자 역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라고 생각했다. 


몇 달 후 엄마가 보낸 이 소포 때문에 또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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