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좌충우돌 컬리지 적응기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거의 모든 수업에 발표 과제가 있었는데 학생이 많은 수업은 주로 팀을 짜서 하고, 학생이 별로 없는 수업이나 발표과제가 거의 메인인 수업은 혼자서 했다. 팀을 짜서 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팀원이 각자의 부분을 발표해야 하기 때문에 발표를 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업은 4학기 동안 별로 없었다.
컬리지 입학 전에 다른 학교나 어학원을 다닌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생애 첫 프레젠테이션을 컬리지 첫 달에 바로 했어야 했는데 이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게 싫을 정도로 너무나도 하기가 싫었다. 사람들 앞에 나가 발표를 한다는 것 자체도 떨리고 부담스러운 일인데 그것을 영어로 해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어김없이 시간은 흘러 발표를 해야 하는 날이 왔다. 다행히 그전에 이미 같은 수업을 듣는 다른 친구들과 친해져 다 같이 재밌게 수업을 듣는 분위기가 되었는데 그래도 앞에 나가 발표를 한다는 것은 매우 떨리는 일이었다. 앞에 나가자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과제는 회사, 기업을 정해서 소개하는 일이었는데 어떤 기업을 준비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생애 첫 프레젠테이션을 끝냈다. 해치웠다는 표현이 더 맞을 만큼 준비한 대본을 재빨리 읽고, 질문에는 단답으로 대답하고 내 차례를 끝내버렸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기만 했다. 그래도 매우 낮은 점수는 아니었고 다른 과제들로 점수를 메꿀 수가 있어서 넘어갔다. 앞으로 모르는 애들이 잔뜩 있는 수업에선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커졌다.
'두려움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란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마케팅 과라서 발표 과제가 많아도 너무 많았고 매번 내 차례 전에 찾아오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머리가 하얘지고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까지 느꼈지만 할수록 점점 더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두렵고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하다 보니 더 잘 참을 수 있게 되었고 적어도 좀 더 침착하게 되었다.
그러다 마지막 학기에 광고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역시나 그룹으로 준비해야 하는 굉장히 중요한 과제가 있었다. 그 과제는 학교의 두 졸업생이 만든 양말 브랜드를 효과적으로 토론토에 홍보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제품을 홍보할 것인지를 정하고 그에 맞는 전략들을 짰는데 과제에서 이긴 1위 팀은 실제로 졸업 후 그 회사에서 인턴생활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다. 졸업 후 하루라도 빨리 인턴이 아닌 제대로 된 취업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전혀 관심 없는 이야기였는데 다행히도 다른 팀원들 모두 나처럼 국제학생이라 '어떻게든 점수만 잘 받아보자'로 의견이 모아졌다. 마치 졸업과제와도 같았던, 매우 중요했던 이 과제는 실제 광고회사에서 모든 팀원들이 앞에 나가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팀의 대표 한 명만 발표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발표를 위해 팀원들이 뽑은 사람만 대표로 발표할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우리 팀은 모두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심지어 캐나다에 어릴 때 이민 온 것도 아닌 유학생들이라 다들 발표는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결국 나와 이집트에서 온 내 친구가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다른 팀원들의 몫까지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인인 팀원 두 명이 '못해도 된다. 그래도 네가 우리보단 낫다'며 격려해 주었고, 다행히 우리의 발표 시간에 다른 팀들은 강의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어 청중은 오직 교수님 한 명뿐이었다. 우리는 하키 경기장에서 게임과 SNS 이벤트를 통한 홍보를 기획했으므로 팀원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강의실에 입장한 후, 실제 경기장 밖에서 사람들에게 외치듯이 '무료 응원도구 받아 가세요'라고 외쳤다. 바로 교수님에게 다가가 '오늘 게임 이길 것 같나요? 우리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면 무료 응원 도구를 드려요'라고 하며 연기했다. 그러자 바로 화면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이집트 친구가 '당신은 지금 저희의 홍보의 일부를 직접 경험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발표를 시작했다.
교수님이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고, 임팩트 강하게 발표를 시작해서 잘 풀리는 느낌이었고, 생각해 보니 학교에서의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이어서 더욱 자신감 있게 친구의 뒤를 이어 발표했다. 발표가 끝나자 교수님은 아이디어와 다른 부분을 칭찬하면서 '특히 발표가 너무 좋았다. 직접 경기장에 온 느낌이었고 두 명의 발표자가 잘 정리해서 발표했다'라고 평가해 주었다. 강의실을 나오자마자 다른 팀원들과 기뻐하며 '우리 1등 하면 어쩌지? 인턴 하기 싫은데'라고 김칫국까지 마셨다. 그렇게 어쩌면 내 인생에서 다신 없을 프레젠테이션을 매우 기분 좋게 끝냈다. 역시 어떤 일이라도 계속하다 보면 나아진다. 나의 첫 프레젠테이션은 최악이었지만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은 단연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