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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Mar 07. 2019

고양이와 나태천국




나태지옥, 근면천국


웹툰이 원작인 영화 <신과 함께>에 등장하는 ‘나태지옥’을 아시는지. 망자들은 이 곳에서 생전의 나태함을 심판받는데, 영원히 달리는 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기실 내가 아는 모든 한국인은 나태지옥에 가려야 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늘 업무를 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을 때에도 머리 한구석에는 업무를 위한 공간을 남겨둔다. 저녁 시간, 편하게 술을 마시다 갑자기 상냥한 목소리로 “네네 부장님”하고 전화를 받던 친구의 모습을 불과 지난주에도 본 참이다. 


과거에는 그러려니 했다. 사람이라면 응당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OECD 근로시간 3위 한국에 사니까, 다들 그렇게 사니까. 하지만 이 생각은 고양이와 같이 살면서 바뀌었다. 나태하면 안 된다니... 얼마나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나!  

illust by Jeony



누군가 나태함을 묻거든 고개를 들어 고양이를 보게하라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라면, 무릇 나태함의 정수를 맛보게 된다. 고양이라는 족속은 절대 부지런한 법이 없다. 평생을 살면서 근면 성실한 고양이는 본 적이 없다.(당신의 고양이가 바지런하다면 동물병원에 데려가세요.) 고양이들은 청소년기까지 시도때도 없이 우다다를 하고 사람의 손발을 깨물지만, 그것을 부지런함의 범주에 넣기는 어렵지 않을까? 청소년기의 주체할 수 없는 혈기와 에너지는 종을 뛰어넘는 것이니까. 그렇게 파란만장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중성화까지 하고 나면, 본격적인 나태천국이 펼쳐진다. 


면밀하게 내 고양이들을 관찰한 결과, 이들은 하루 16시간쯤 자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자는 것은 사실이나 워낙 평생을 잠만 자는 족속들이다.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그루밍을 하기 때문에,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한 스케줄이다. 자거나 먹거나 몸을 치장하거나. 이 간결한 일과에 부지런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묘생을 허투루 쓴다는 죄책감 역시 있을 리 없다. 츄르를 내놓지 않는 인간에게 가끔 힐난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다.  

illust by Jeony



행복은 성실함 순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그 가운데서도 업무량이 많은 직업을 택했던 나는 너무나 바빴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업무로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도 헌납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침에 사료를 주고 나가는 것도 여유롭지 않았다. 늦은 밤 집에 오면 고양이와 놀아줄 기력도 없어 지쳐 쓰러지곤 했다. 운 좋게 쉴 수 있던 어느 주말, 꾸벅꾸벅 졸던 고양이가 햇빛 냄새를 머금고 내 몸 위로 올라왔다. 분명 우리는 함께 사는데, 고양이의 이 온기를 느껴본 것이 퍽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태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지만, 놓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볕 좋은 날 고양이와 나란히 해바라기 한 번 해줄 수 없었고, 좋아하는 장난감 한 번 흔들어준 지가 언젠지 까마득했다. 


그래서, 나는 각성했다. 더 여유로운 일을 찾았고, 예전처럼 종종거리며 집안일을 하지도 않는다. 고양이들만 입성 가능할 줄 알았던 ‘나태천국’을 찾은 것이다. 일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은 뒤, 내 고양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길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주변의 모든 인물은 부지런하다. 하루 중 대부분 일을 하고 있거나, 적어도 일을 ‘생각’하고 있다. 아차, 이런 말 하는 나도 주말 한낮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 뭔가. 문서를 닫고 얼른 본연의 나태함으로 돌아가야겠다. 여러분, 우리는 조금 더 고양이처럼 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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