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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Jan 03. 2020

올해 다이어리엔 욕을 쓰겠어요

거창한 목표 말고 나부터 생각하기 

금붙이는 없으니 다이어리 글자라도 금박으로


매년 이맘때면 온갖 곳에서 다이어리가 답지한다. 친구, 전 직장 동료, 심지어 온라인 서점에서도 다이어리를 보내왔다. 다른 다이어리는 선물로 돌리고 올해는 서점 사은품 다이어리를 쓰기로 한다.


자주색 바탕에 금박으로 쓰인 2020이라는 숫자를 응시한다. 2020년을 어떻게 살아볼까 고민하다 문득 지난해 내가 어떤 계획을 세웠나 궁금해졌다. 2019년 다이어리를 펼쳤다. 가장 앞장에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지난해 나는 '외국어 공부하기', '독서하기'와 같이 관용구 느낌이 드는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이어리에 딱 한 가지만 썼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 아홉 글자를 꾹꾹 눌러쓸 때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내가 틀렸다. 세상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없었다. 


2019년에 나는 직장을 잃었고, 그러면서 몇몇 지인과의 관계도 끊겼다. 해직은 '다음 주까지만 나오라'는 말로 간단하게 이뤄졌다. 이후 내가 나를 지켜야겠다 싶어 제 발로 찾아가서 방송작가유니온에 가입했다. 비슷한 일을 겪은 작가들을 만나 서로의 얘기를 나눴다.


해직 이후 걱정이 많아져서 '노워리살롱'이라는 걱정 술집을 갔는데 이젠 거의 스태프처럼 드나들게 됐다. 1년간 잃기도 많이 잃고 얻기도 많이 얻었다. 재미있는 점은 직장을 잃은 이후 더 많은 인연을 만났다는 거다. 



해고당한 뒤 한동안은 집이 참 깨끗했다.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책임자의 말 한마디로 면직당한 당시에는 마음이 온전치 못했다. 그 상황에도 '생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볼이 푹 꺼진 채로 운동하고 청소하고 책을 읽었다.


운동과 청소 사이에 짬이 나면, 잠깐의 공백이라도 생기면 해고되던 그 날 그 순간이 회상됐다. "다음 주까지만 나오세요", "(잘리는)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던 책임자의 표정부터 손도 대지 않고 식어버린 아메리카노까지. 모든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면 한발 늦은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열심히 일한 게 죄인가? 적어도 잘리는 이유는 정확하게 고지해줘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그렇게 잠깐씩 분노에 이글거리고 나면 깜짝 놀랐다. 서른여섯이나 먹고 난 왜 이렇게 감정적일까. 새해 계획으로 거창하게 '누구도 미워하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어린애처럼 사람이 미워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라니. 그러면 황급히 책을 펼치거나 TV를 켜고 아무 프로그램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미워하지 말자. 동요하지 말자. 감정 쏟지 말자. 속으로 되뇌면서. 


면직 이후 얼마간은 도 닦는 심정이었다. 감정은 차단하고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마음 회복이 더뎠다. 미움을 '옹졸하고 졸렬한 것'이라고 단정 짓고 거기에 나를 맞추려 애썼다. 미워하는 내 마음을 똑바로 바라봤어야 하는데 졸렬한 사람이 되기 싫어 아닌 척했다. '척'은 언젠가 밑천이 바닥나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나도 우울감이 해소되기는커녕 일상이 무기력해졌다. 


손바닥에 작은 상처만 나도 온종일 들여다보면서 마음에겐 왜 그리 인색했을까


사람이 상처를 입으면 환부가 얼마나 깊은지, 꿰매야 하는지 약만 바르면 되는지 일단은 똑바로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혼자 삭일 수 있는지 아니면 상담이 필요한지 먼저 살펴야 한다. 과정에서 누군가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 역시 관찰 대상이다. 나는 왜 그 사람이 미울까, 그에게 나는 어떤 상처를 받았나, 그래서 나는 어떻게 치유하고 싶나. 내가 찾은 방법은 글이었다. 


첫 장에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를 적었던 2019년 다이어리에 두서없이 내 감정을 쏟아냈다. 미워하지 않겠다더니 육두문자를 쓰느라 손이 다이어리 위를 날아다녔다. 그렇게 글로 사자후를 쏟아내고 나니 기분이 한결 후련했다. 이렇게 다채로운 욕을 꾹꾹 눌러 참았으니 탈이 날만도 했다. 


육두문자 다음은 사건의 재구성이었다. 눈물이 나면 울면서 그날의 일을 글로 적었다. 장면 장면을 쓰다 보니 나도 모르던 내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나는 개인과 구조 모두에게 상처를 받았던 거였다.


사람 대 사람으로는 면직 통보 과정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책임자에게 분노했다. 어제까지는 '우리' 다 같이 잘해보자더니, 오늘 갑자기 '당신'은 나가 달라는 말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책임자가 그토록 미웠던 것이다. 또 열심히 일하는 구성원 신분이 프리랜서라는 이유만으로 말 한마디, 전화 한 통에 내쫓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아, 그래서 내가 괴로웠구나. 자욱하던 안개가 걷힌 것처럼 시야가 맑아졌다. 


해고 통보를 받던 날을 복기한 글은 용기를 내어 브런치와 오마이뉴스에 올렸다. 이후에도 내가 품고 있던 막연한 답답함을 풀어내기 위해 방송계 프리랜서의 현실에 대한 글을 몇 편 더 썼다. 미움이 동력이 된 셈이다.


내 감정을 '쓰기'로 정리하면서 신기하게 미움도 녹아내렸다. 처음엔 땡감처럼 딱딱하고 떫던 마음이 글을 통해 말랑하게 숙성됐다. 이젠 나를 자른 장본인을 우연히 만나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이어리 첫 장엔 어떤 계획도 쓰지 않기로 했다


다시 오늘로 돌아와서, 2020년의 새 다이어리에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 같은 말은 쓰지 않기로 한다. 그냥 맨 앞장은 깨끗하게 남겨두기로 했다. 어차피 무슨 말을 쓰든 지키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그 대신 2020년에는 스스로의 감정을 직시하는 데 노력을 쏟고 싶다. 묵은 상처와 걱정도 쓰며 풀어볼 참이다. 그게 설령 욕일지라도.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한 해가 아니라, 나를 미워하지 않는 한 해를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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