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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Nov 24. 2020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그리고 부끄러운 마음


지역 방송사의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로 일하던 시절엔 하루가 한 시간 같았다. 아침에 제작자 겸 진행자 선배와 당일 아이템을 선정하고, 인터뷰 상대를 물색하고, 연락을 돌리고, 섭외가 펑크 나면 대체자를 구하고, 질문지를 구성하다 보면 시간이 세네 시간씩 뭉텅이로 지나 있었다. 폭풍 같은 전초전을 끝내고 나면 그날 방송의 오프닝을 쓸 수 있었다. 그 순간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2분 남짓한 오프닝 멘트를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그날 원고의 만족도를 결정했다. 라디오 원고의 첫 장만큼은 오롯이 내 차지였다. 제작자 선배는 오프닝에 한해서는 무한한 자유를 줬다. 가끔 오해될 만한 표현을 고치기는 했지만 어떤 이야기를 할 지는 내가 결정했다. 딱 하나 쓰지 않은 이야기는 있었다. 방송과 언론의 그늘에 존재하는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의 이야기들은 쓰지 못했다. ‘나 힘들다’는 투정 같아 차마 쓸 수도 없었거니와, 써봐야 저 높은 곳 윗선에서 자를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할 때에도, 당시 정권이 4.3 소설가 김석범 선생의 방한을 막아 노작가가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집단 유산 문제가 법적으로 업무상 재해에 해당된다는 판결이 나온 날에도. 늘 쓰고 싶었고, 그래서 썼다. 당시 내가 있던 지역사 프리랜서 라디오 작가 원고료는 200만 원보다 100만 원에 더 가까웠다. 박봉에 늘 입술이 터 있을 정도로 긴장하고 살았지만 그래도 일이 좋았다. 마음에 드는 오프닝을 하나 손에 쥐고 나면 다음 원고를 쓰고 다음 사람을 섭외할 힘이 생겼다.



쓰고 싶은 모든 것들을 오프닝으로 썼다. 단 한 가지 빼고.



내 책상이 있던 지역사 방송국 편성제작부는 밤이면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 어둡고 적막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잔업을 하던 내게 우리 프로그램과 관계 없는 한 정규직 선배가 말을 걸었다.


“오늘 낮에 본사에서 특집 때문에 왔더라?”

“그렇더라고요.”

“본사는 페이 잘 주잖아. 너도 가서 ‘시다’라도 시켜달라고 해~”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놀라서 굳은 나를 두고 그 선배는 상쾌하게 퇴근했다. ‘시다’라면 신입작가를 얘기하는 건가. 자기 눈앞에 있는 지역사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와 이름도 모르는 본사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입작가를 동시에 욕보이는 화법이라니. 결국 나는 혼자 한참을 불이 반 꺼진 편성제작국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집에 갔다. 섭외도 혼자, 구성도 혼자,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로 열심히 일해 왔다고 자부하는데 가서 ‘시다’라도 하라니. 모욕적인 언사가 잊히지 않았다. 오래 불쾌했다. 문제제기는 하지 않았다.


5년쯤 지나 다른 지역의 작은 방송사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작가로 일하게 되었다. 1년을 조금 못 채우고 나가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와 대면했던 피디는 무구한 얼굴로 “저도 이유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어제까지는 나랑 코너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더니 오늘 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얼빠진 얼굴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온몸이 욱신거려 앓아누웠다. 다시 평정을 되찾기 위해 몇 번의 여행과, 몇십 번의 위로와, 열두 번의 글쓰기 모임과, 두 번의 일자리 제안과, 크리넥스 서너 통과, 고양이 두 마리만큼의 온기가 소요됐다. 오래 앓았다. 문제제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이 사진을 보고 말았다.          출처-방송작가 유니온



지난해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작가님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뉴스(방송작가 A 씨, 제가 감히 응원해도 될까요)를 접하고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미안해서. 면구스러워서. 안절부절못하다 하루 종일 글을 써 브런치와 오마이뉴스에 올렸다. 다음날에는 그녀가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광장으로 버스를 타고 찾아갔다. 그날 방송작가노조(방송작가 유니온)에 가입했다. 이후 방송국에서 프리랜서를 대상으로 작성하는 변종 계약서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썼다. 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방송국 속 비정규직의 실태를 썼다. 현직에서 전직으로 바뀌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졌다. ‘이 글을 쓰면 잘리는 거 아닐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다시 돌아갈 곳 없는 사람만이 업계를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약간 외로워진다. 나는 아직도 매일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에서 근사한 오프닝을 듣게 되면 심장이 뛴다. 심야 라디오에서 취향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기뻐하며 (혼자) 단골 청취자가 될 것을 약속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그렇지만 모두가 알았으면 하는 시민의 선행 이야기를 아침 시사 라디오에서 다뤄주면 마음이 흐뭇해 제작진에게 국밥이라도 대접하고 싶다. 결국 생각한다. 브런치에 방송사 문제를 아직까지도 끄적이고 있다니 나 참 어지간히 방송 좋아했구나. 마음이 없으면 비판도, 고민도 없는 법이니까.



대체 방송이 뭐길래, 라디오가 뭐라고



내가 조금 더 일찍 각성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가서 ‘시다’라도 하라던 선배에게 해당 방송사 노조를 통해 공식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이유는 잘 설명해줄 수 없지만 그만 나오라던 피디에게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아마 사과는 받았을 것이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그리고 두어 달 뒤 나는 ‘이 프로그램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정중한 어조의 말을 듣고 어영부영 인수인계를 한 뒤 떠나야 했을 것이다. 너무 앞서 나간 것 아니냐고, 운이 나빠 내게만 일어난 일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이들을 위해 최근 일주일 간 이 업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알려드리고 싶다.


만나면 좋은 친구 MBC는 최근 아침 뉴스 프로그램 작가 두 명과 서울지방노동위원회 부당해고 구제를 두고 다투고 있다. 두 작가는 만 9년을 MBC 7층 보도국의 특정된 자리에서, 고정된 업무를 진행했다. 매일 정기적으로 출근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프리랜서라서, 선례가 없어서 노동자성을 인정받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관련기사-'가짜 프리랜서' 보도국 작가들 "나도 노동자" 싸움 시작됐다)


공영방송 KBS는 저널리즘 토크쇼 J 개편을 위해 소위 ‘시즌 오프’ 결정을 내렸다. 정규직을 제외한 20명 안팎의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들은 사실상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작가들은 마지막 회 집필 거부를 선언했고 CG 디자이너들은 11월까지만 근무하겠다고 결정했다. 해당 방송에 몸 담았던 프리랜서 정주현 피디는 페이스북을 통해 “부당한 계약 종료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제가 일했던 곳이 대한민국 최고의 방송국 KBS였기 때문이다. 노동자 정신의 근간인 전태일 열사 이야기를 방송으로 만들며, 그 방송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해고하는 이 구조적 모순. 이런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는 곳이 지금의 KBS”라고 말했다. (관련기사-저널리즘토크쇼J 중단, 해지 통보에 '비정규직의 눈물')


최근 일주일 소식만 봐도 이렇다. 수면에 떠오른 일들 아래엔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을 것인가. 직을 걸 수 없는 이들, 노동위원회에 찾아갈 기력조차 없는 이들은 또 어떤 얼굴로 하루를 견뎠을 것인가.



모든걸 내려놓을 각오로 방송사에 맞서는 사람들, 그 뒷모습이란...



그래서 나는 뒤늦게 쓴다. 온갖 것을 쓸 수 있었지만 방송 현장만큼은 쓰지 않았던 비겁한 시사 라디오 작가에 대해. 가서 ‘시다’라도 시켜달라고 말하라던 선배에 대해. 방송사 고위직의 말 한 마디에 우수수 나가 떨어지던 프리랜서의 명운에 대해. 내가 보고 느꼈던 방송 현장의 부조리에 대해. 그리고 오늘도 그 부조리에 맞서는 사람들에 대해. 이건 내 방식의 참회다. 내가 하고 싶었던 문제제기를 대신 하는, 그래서 하루를 살아내는데 안간힘을 써야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부끄러운 응원이다. 시사 라디오 작가 시절 쓰지 못한 유일한 오프닝을 이제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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